제목 |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하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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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10-01-25 | 조회수52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루카 1:16-21)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몇 년 전에 브로드웨이에서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Peter Shaffer)의 작품『태양 제국의 멸망(The Royal Hunt of the Sun)』이 공연되었다. 16세기 페루에 있는 인디언들을 정복하는 이야기이다. 이 중 한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인디언 추장에게 성경을 건네자 추장은 성경을 귀에 대고 들으려고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화가 나서 성경을 내동댕이쳐버렸다.
이 장면은 우리들이 미사 참례를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오리겐(Origen)은 집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했다.
“여러분들은 성별(聖別)된 빵 조각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주 그리스도의 몸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또 놓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셨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기쁜 소식일까?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는 것일까? 예이츠(Y. B Yeats)는 정치적 혁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위대한 날(The Great Day)>이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위대한 날>
혁명 그리고 더 많은 대포 발사 만세!
말 탄 거지가 걸어가는 거지에게 채찍질을 한다 혁명 만세 그리고 대포가 다시 발사된다. 거지들은 지위를 바꿨지만 채찍질은 계속된다. 혁명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혁명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고 국민들의 고통은 계속될 뿐이라는 것을 이렇게 노래했다. 혁명은 기득권 자에 대한 질투로 시작된다고 했다.
이는 결코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고 가난함으로 인하여 무엇을 보상 받는가?가난이 값진 것인가? 가난의 가치를 알기는 어렵다.
우리들은 가난이란 어떤 좋은 것을 부자만큼 갖고 있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가난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예수님의 시대에는 부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표징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표징으로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구걸할 때 부자가 반기면서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같은 위엄을 지녔고 복음 말씀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쁜 소식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이나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소식이다. 이 말에는 부자에 대한 비난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루카 저자는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이라고 덧붙였다.(루카 6:24) 다른 말로 하면 부자는 이 세상이나 다음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되므로 지금 부(富)에 매달리고 있다는 말이다.루카 복음(16:14-24)에서 부자가 눈이 멀었던 것처럼 부(富)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 부자는 자신의 부에 대하여 감사할 줄도 몰랐지만 그의 문 앞에 서있는 종기투성이의 가난한 라자로의 처지도 외면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미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富)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작은 형제회의 고 바오로 신부님께서 가난에 대하여 잘 정리해주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냥할 때 거절당하거나, 모욕당할 때
모욕은 주는 사람이 잘못이지 당하는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는 경계를 분명히 한다. 모욕을 당할 때, 화가 나거나 하면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성숙된 상태이다.
내 안에서 육(Caro)과 영을 구분하지 않으면, 즉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육의 영향을 받고 육의 노예가 된다. 그러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다.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하느님과 나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선(善)은 하느님의 것인데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나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하고, 이것을 하느님께 분명히 돌려드려야 한다. 우리는 나의 것이라고 하지만, 선천적으로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내 안에 신비의 영역을 분명히 할 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순종은 타인에게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은 진선미다.
순종과 가난을 깊게 이해하고 사는 거나 관상을 깊게 이해 하고 사는 것은 같다. 타인에게 들을 때 자유스럽고 독립된 존재로 살수 있다. 순종하지 않을 때, 예속적인 관계로 떨어 진다.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상태로 가는 경계를 가난이라고 설명한다. 종속이나 예속적인 관계는 모호하고 불 분명한 상태이다.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며 가난 하지 않다는 것은 뭐든 내 것으로 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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