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부
D. 하늘과 땅 (원죄)
a. 죄와 고통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기에 좋았다고 하십니다. 보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좋은 것만을 창조하시고 악이나 고통과 같은 것들은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존재하는 악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병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예수님은 이처럼 ‘병자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동일시하십니다. 이 말은 당시 인간의 고통은 죄로 인해 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 생각이 틀리지 않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마태 9,6)
죄와 고통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아담과 하와의‘원죄’입니다.
창세 2장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5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인간을 데려다 놓으시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열매들을 따 먹도록 하셨는데 이 중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유’를 주셨지만 인간이 하느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있지만 넘지 말아야할 선도 있었는데 바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이 선까지 넘을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은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는 영역까지 자유롭게 놓아두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보장하고 절대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알게 하는 열매만이 있습니다. 악을 알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일단 악을 알게 되면 하느님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악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 그 곳은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따라서 악을 밖으로 내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죽음’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죄는 하느님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라 말씀하시면서도 (야이로의 딸, 라자로)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고 하시며 당신을 따르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진짜 ‘죽음’이라고 하십니다. (마태 8,22; 루카 9,60)
“죽음의 독침은 죄이고,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1코린 15,56)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고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 이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 ‘법’은 바로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을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즉,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곧 ‘법’이기 때문이고 이 법은 모든 인간의 양심에 쓰여졌습니다. 법이 없다면 죄도 없겠지만 한 번 ‘악’을 알게 된 이상은 지울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누구나가 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로마 5,12-13)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태평성대를 누렸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바빌론의 유배는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믿어왔던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이교도 인들의 발에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현실은 너무나 뼈아픈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그들의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었고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성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면 하느님은 그들을 떠나시고 계약을 파기하시며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죄’로써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모든 고통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창조해 주셨는데 결국 그 행복을 잃게 된 것은 인간 자신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반성하게 된 것입니다.
- 에덴 - 죄 - 땅(고통) - 그리스도 - 에덴
- 가나안 - 이집트 (죄) - 고통 - 모세 - 가나안
- 자유 - 죄 - 식민지 - 판관 - 해방, 자유
- 왕 (다윗)- 죄 (밧세바) - 도망 - 다시 복귀
- 성전 - 죄 - 성전파괴와 유배 - 회개 - 귀향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
이런 공식은 성경의 모든 부분에 적용 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셔서 지옥까지 내려가셨다가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도 죄에 떨어졌지만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계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 죄도 없이 자연재해로 죽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이런 온갖 역겨운 짓을 저질렀고, 그래서 그 땅이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가 그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 그 땅이 너희보다 앞서 그곳에 살던 민족들을 토해냈듯이 너희를 토해내지 않게 하여라.”(레위 18, 27-28)
아담은 땅으로 빚어졌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자 땅도 함께 저주를 받아 삭막한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죄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는 어쩌면 그 때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재해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어쨌건 내가 만약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난들이 어찌 나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