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6 연중 제3주간 화요일
2사무6,12ㄴ-15;17-19 마르3,31-35
"하느님"
어느 호스피스 수녀님이
임종을 앞두고 죄에 괴로워하는 어느 수도자에게 준
지혜로운 조언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요?
살면서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 감정에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건 죄가 아니죠.
다만 수도자로서 범한 잘못이 있다면
그건 사제한테 고해성사로서 푸셔야 하는 거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닌 사랑이 많아 순결한 마음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잃어 길 잃은 문명이요,
사랑을 잃어 황폐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수도자들이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은 아마 ‘하느님’일 것입니다.
시편 성무일도나 미사 중 무수히 나오는 하느님 이름입니다.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가장 모르는 하느님이요,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가장 멀리 있는 듯이 느껴지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이자 우리의 평생화두입니다.
세상의 것들 모두는 환상이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실재입니다.
세상 보이는 것들에 뿌리 내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뿌리내려야 한결같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하느님만을 찾으며
하느님의 일인 기도에 전념하는 우리 수도승들에게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요, 하느님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있어 빛과 생명, 희망입니다.
하느님 있어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하느님 있어 참됨과 좋음과 아름다움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을 체험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느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행함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긴 성경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 형제들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의무라기보다는 사랑의 자발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미사하고,
일하고, 독서하고, 봉사할 때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여기에서 샘솟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바로 이게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주님 앞에 기뻐 춤추는 다윗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하느님의 궤, 하느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추는 다윗처럼,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제대,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주님께 사랑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우리 역시 다윗처럼,
이 거룩한 미사 중 우리 전부를 사랑하는 주님께 산 제물로 봉헌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하느님이요 우리 삶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이 삶의 중심에서 하느님이 빠지고,
이 삶의 내용에서 사랑이 빠지면 남는 건 무의미와 허무의 어둠뿐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형제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풍요롭게 사는 길은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행하는 길 하나뿐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당신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성체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사랑, 나의 행복아십니다.”
(시편1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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