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Aztec)의 옛 시인은 “아무 것도 영속할 수는 없다”고 했다지만, 오직 하나 민중만은 영원하다. 국가도 민족도 제국도 문명도 문화도 다 사라져도 민중만은 살아남으리니 민중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저변이요 핵심이다.
민중의 삶이란 생존애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언제나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상황적 부침이 거의 없는 안정된 생명력의 기저집단(基底集團)으로 만들어 역사의 주체요 항구적인 동력원이 되게 하였다. 그들은 역사를 잉태하는 자궁과 역사를 키우는 모유를 지녔고 그 역사에 살과 피를 제공하였다.
마치 꽃은 시들지라도 풀뿌리는 죽지 않고 거듭거듭 살아남아 봄을 일깨우듯 모든 제국들과 왕조들은 멸망했을지라도, 민중은 그 숱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다. 그 생존애는 인류에게 영원히 부활하는 생명에 대한 희망의 원천이 되어 왔고 또 되고 있고 또 될 것이다. 이제 그 민중 주체의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민중의 부활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라는 것은 먼 옛날엔 그렇지 않았음을 말해주는데, 고대 왕국시대 이전 원시공동체사회는 억압과 착취가 없는 민중의 시대였다. 그러나 절대권력의 왕정시대가 열리자, 피지배계급으로 몰락한 그들은 모든 것에서 소외되며 수천 년에 걸쳐 생죽음의 유배시대를 겪게 된다. 자기 언어(말씀)와 자기 자신(참나)을 잃어버린 채 민중은 때론 노예로 때론 천민으로 심지어 죄인으로까지 여겨지며 폭압 권력에 이리저리 쫓기며 살아왔었다.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잃어버린 민중언어의 되살림 사건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 하느님 말씀의 성육신 사건은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민중에게 자기 언어를 되찾아 주려는 말씀 재창출의 역사, 하느님 선교(Missio Dei)의 시작이었다.
말할 권리조차 잃어버렸기에 모든 힘을 잃고 철저히 소외당하며 살던 그들이 ‘잃어버린 말씀’을 다시 되찾고자, 하늘을 향해 피맺힌 절규를 했던 그 민중적 원한(怨恨)에 대한 하느님의 해원(解寃)적 응답이었기에 그것은 결국 ‘말씀의 옴’일 수밖에 달리 없었던 것이었다.
마굿간 탄생이야기에서 보듯 민중 안에서 민중으로 태어나, 그 시대의 소외지역이요 민중의 땅인 나자렛과 갈릴래아에서 그들과 함께 민중이 되어 자라나며 나지르인으로 생활하신 그분은, 공생활 역시 가난한 자·병자·죄인 등의 민중의 터 위에서 펼치시며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외치시다, 끝내는 반(反)민중적 권력에 의해 고발당하여 민중처럼 알몸으로 처참히 그리고 억울하게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꼼짝없이 죽임 당하시고, 민중의 언어가 그러하듯 다시 살림을 받아 끝내 말씀의 부활을 이루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나긴 말씀(민중)의 유배는 일단 급격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갇혔던 말씀이 죽음, 아니 죽임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풀려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씀을 죽이려던 온갖 악한 짓들은 그로써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되며 좌절되고 거짓은 깨트려지고 진실이 드러나며 말씀은 진정 진실을 죽이려 했던 거짓된 구조인 죽음마저 이겨내신 것이다. 그것은 진정 민중 언어인 말씀의 부활이요 자유로서, 민중의 승리며 부활로서 민중시대로의 대장정(大長征) 그 효시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과연 보라. 그분이 오신 뒤 그분(의 복음)에 의해 ‘참나’ 아니 잃어버렸던 ‘옛나’를 되찾고서 갈수록 역사의 전면(前面)으로 부상하면서 민중의 시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놀라운 역사를! 인류의 역사란 민중의 점진적인 고양(高揚)의 파노라마요 새 하늘 새 땅에로의 순례여정이 아닌가.
묵시록은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군중을 향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참으로 복된 자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너희는 누룩이다. 너희는 겨자씨이다. 너희는 포도밭이다. 너희는 양떼다. 너희는 가장 작은 자이다. 너희는 내 형제요 참된 가족이다.
기실 그 행복과 소금과 빛, 누룩, 겨자씨, 포도밭, 양떼, 작은 자, 형제, 가족이란 단어는 교회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진정 그분 안에서는 우리가 교회인 것이다. 그분으로 인해 교회는 그들과 일심동체가 되었다. 아니 그들 안에서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럴 때 묵시록의 그 말씀은 더 이상 묵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이 시대의 교회헌장이 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도권의 이름으로 장엄하게 선포되었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라는 표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두고 있는 것이다.
교회, 해방과 자유의 희년 그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져야
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유물론적인 시대에 교회는 진실로 나지르인을 필요로 한다. 아니 교회가 나지르인이 되어야 한다. 배고픈 이들을 위해 교회는 배고플 필요가 있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교회는 헐벗을 필요가 있고, 갇힌 이들을 위해 교회는 갇힐 필요가 있다. 아니 이 세상에 배고프고 헐벗고 갇힌 자가 하나라도 있는 한, 교회는 배고프고 헐벗고 갇힌 자가 되어야 한다.
그분은 다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분 위에 내렸던 그 거룩한 영을 교회는 다시 받아야 한다. 그분처럼 가난한 이들의 기쁜 소식이 되고, 잡혀간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이 되는 희년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순례여정 그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정중규(‘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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