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4주간 월요일 - 받아들이기 위해 버려야하는 것들
어떤 선교사가 문명이 아직 이르지 못한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본 것은 그들이 무거운 짐들을 손, 어깨, 머리 할 것 없이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먼저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수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레 하나를 다 완성해 갈 즈음에 고국에 잠깐 들어갈 일이 생겨서 원주민들 보고 수레를 한 번 이용해 보라고 하고서는 잠깐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면서 그들이 수레를 잘 이용하며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만들어놓은 수레는 건들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우리가 들고 다니는 것도 무거운데, 저 무거운 것까지 함께 끌고 다니라는 겁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레가 무거워 보이고 짐처럼 여겨져서 사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게라사 지방으로 가십니다. 돼지를 키우는 지역이라는 것은 비록 갈릴래아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교도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법에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키우지도 먹지도 가까이 가기도 원치 않아했던 동물입니다.
역시 그 곳에는 군대라고 불리는 마귀 들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곳에 마귀 들린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부재가 곧 지옥이고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도 곧 죄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둠의 지역에 빛을 비추어주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 마귀들이 수많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돼지 떼는 여기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수많은 부정한 생활풍습을 상징합니다.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마귀는 부정한 풍습들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은총을 베푸셨는데 돼지 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끊어야 하는 것들이 동시에 많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남들과 싸워서도 안 되고, 거짓말을 해도 안 되고, 사기를 쳐도 안 되고, 부정한 죄를 지어도 안 되고, 주일날 일해서도 안 되고, 부부끼리 싸우고 미워해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것들이 수 없이 많이 생깁니다. 정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짐스러워서 중도에 교리를 받다가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깁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많이 생기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 게라사 주민들에겐 빛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잃은 돼지 떼가 아깝습니다. 예수님께 더 이상 동네에 손해를 끼치지 말고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은총을 주시고도 동네에서 쫓겨나십니다.
수레를 처음 본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지고 다니는 짐들보다 수레가 더 무거워 보이기 때문에 수레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을 더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손해막심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탄의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기껏 모세의 말을 듣고 이집트를 탈출했더니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보이는 것은 오직 사막뿐입니다. 언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달할지는 기약도 없습니다. 이집트에선 부족함 없었는데 사막엔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음식도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후회가 되어 모세와 하느님께 한탄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더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시기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게라사인들이나 예화에 나오는 원주민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당연히 내가 어둠에 있었다면 또 빛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면 어둠의 행실은 벗어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녀들이 벽에 낙서해 놓은 것도 지우기 어려운데 오랜 시간 내 안에 묻어있는 때를 벗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고생길입니다. 그러나 그 고생이 두려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한 어둠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게라사엔 가시지 않습니다.
처음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잃어야 하는 것들이 많게 보이고 그것이 손해막급인 것처럼 생각이 들어도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 하심을 믿어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어둠의 행실 하나만 더 던져버린다면 그만큼 내 안을 빛으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