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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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음란을 피하라
(칼럼니스트 신상래 상담소장)
1. 음란으로 가득 찬 세상
"자, 우리 아침까지 애정에 취해 봐요. 사랑을 즐겨 봐요. 남편은 집에 없어요. 멀리 길을 떠났거든요. 돈 자루를 가져갔으니 보름날에나 집에 돌아올 거예요." 이렇게 갖가지 달콤한 말로 꾀고 매끄러운 입술로 유혹하니 그가 선뜻 그 여자 뒤를 따라가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고 벌받으러 쇠사슬에 묶여 가는 미련한 자와 같다. 화살이 간장을 꿰뚫을 때까지 목숨을 잃을 줄도 모르는 채 그물 속으로 재빨리 날아드는 새와 같다. (잠언 7,18-23)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음란’입니다. ‘음란’이라는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됩니다. 낮에는 모두가 단정하고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도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어두움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력은 서서히 자신의 영역을 관리하며 그 파워를 과시합니다.
거리에 나가면 속옷이 보일 듯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짧은 미니스커트와 고개를 숙이면 젖가슴이 훤하게 보이게 깊게 패인 옷들이 유행의 첨단으로 여겨서 섹시하게 보이고자 다투어 입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학생들이 고학년이 되면 치고받는 게임에서 자연스레 포르노로 관심을 옮겨가며 중고등학생이 되면 자신이 원하는 음란물은 무엇이든 컴퓨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청년이 되면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에 옮깁니다. 순결이나 동정을 마치 열등감으로 여기며 빨리 떼는 것이 성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여깁니다.
영화는 차치하고 TV 드라마에서도 불륜을 빼면 흥행이 되지 않아 엽기적인 불륜으로 시청자를 경악시켜야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심지어 남자들의 동성애로 중국에서 수입이 금지될 정도의 문란한 국산영화가 대박이 나서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소위 꽃미남이 뜨고 있습니다.
용돈이 궁해 원조교제를 구하는 어린 여학생들의 제의를 인터넷만 돌아다니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들이 자신들의 배우자를 바꾸어 잠을 자는 스와핑이 은밀하지만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심지어는 배우자의 허락을 얻어 전라의 몸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인터넷에 띄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들의 직업이 교사이거나 대학강사라고 합니다.
술과 웃음을 파는 직업여성이 아닌 어린소녀들도 자신의 몸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중년남성들은 침을 흘리며 지갑을 열어 지폐를 쥐어줍니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 주부들도 자녀의 학원비를 번답시고 남편 몰래 노래방 도우미나 음란한 성인전화상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남편들은 공공연하게 자신의 외도를 드러내면서, 생활비만 가져다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여기고 이런 사소한(?) 것쯤은 눈감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들도 이런 남편들에게 맞서 애인을 사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애인이 없는 사람은 팔불출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의 주변뿐 아니라 경치 좋은 곳은 어디나 모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며 이들의 사업시간은 대부분 밤이 아니라 낮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우자가 아닌 불륜애인들과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모텔만큼 많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했던 소돔과 고모라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모두 음란의 참여자가 되거나 동조자, 혹은 이들을 구경하려고 혈안인 이들로 거리를 메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2. 쾌락에 목숨을 건다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마지막 때에 힘든 시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2티모 3,1.4)
음란을 추구하는 목적은 쾌락을 주기 때문이지만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쾌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열심을 다한 노동의 성취감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낚시나 등산, 조깅 등의 건전한 취미생활이나 운동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한 방편으로서 선택한 것이며 이러한 것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정신적인 것이며 땀을 흘린 데 대한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음란은 이들과 성질이 다른 즐거움입니다. 음란은 하느님이 주신 성(性)을 그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가 합쳐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얻어 기르며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요인으로 즐거운 성(性)을 주셨고, 이는 정상적인 부부사이에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목적이 아닌 단지 쾌락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 변질하였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로마 1,26-27)
쾌락을 즐기는 추세는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으로 공허함과 불안감의 근원적인 원인과 해결책을 모르므로, 당장의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 주사를 맞는 환자처럼 술과 쾌락을 찾아서 현실의 고통을 잊고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결책은 그날 밤은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밤이 새고 아침이 되면 불안과 공허함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래서 또 다시 쾌락을 찾게 되며 가정이 위태롭고 죄책감으로 괴롭기도 하지만 강력한 유혹의 손길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또한 쾌락도 점차 강도 높은 것을 원해, 불륜의 정도가 심해지고 빈번해지며 변태와 엽기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태로 변해가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가면 정상적인 삶과 가정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므로 가정과 직업을 잃고 결국은 자살을 하거나 노숙자로서 최악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3. 짧은 기쁨 큰 고통
"우둔함이라는 여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어리석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여자는 자기 집 대문에, 성읍 언덕에 자리 잡고 앉아 길을 가는 이들을, 제 길을 똑바로 가는 이들을 부른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우둔함이 말한다.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그곳에 죽은 자들만 있음을, 그 여자의 손님들이 저승 깊은 곳에 있음을 알지 못한다." (잠언 9,13-18)
음란이 주는 쾌락은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며 큰돈이 들지도 않으며 세상적인 풍조로 인해 별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쉽게 빠져 듭니다. 사춘기 시절의 학생들은 인터넷에 수없이 깔린 포르노를 훔쳐보며 자위행위로 쾌감을 얻습니다. 단순한 자위행위 자체가 문란한 음란행위로 규정하기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음란물을 보며 성적인 쾌감을 얻는 행위가 음란하고 퇴폐적인 세상에 들어가는 입구로 작용하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에 심취한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음란의 파도에 휩쓸려 들어갑니다. 겉보기에도 큰 문제없어 보이는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같이 노래를 하다보면 쉽게 불륜에 빠지기도 하며,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밤거리를 수놓는 나이트클럽이 소위 부킹을 잘해주는 곳으로 물 좋다는 소문이 나야 많은 남자들이 북적거리게 되므로, 웨이터들은 공짜라는 미끼로 여자들을 끌어들이고 술 취한 남녀들을 합석시켜 탈선과 불륜의 온상으로 작용합니다.
물론 이러한 곳에 발길을 끊으면 이 같은 유혹에서 자유롭겠지만, 우리나라의 술 문화는 간단하게 1차가 아니라 2차, 3차로 이어지며, 술에 취하면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이 관례처럼 이어지는 행사가 되어, 평상시에는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인 가장이라도 술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쾌락의 유혹 앞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도 날이 새고 술이 깨면 정상적인 직장과 가정으로 돌아오겠지만, 명함을 주거나 전화번호를 받은 노래방 도우미나 나이트클럽에서 부킹한 여인과 탈선으로 이어지며 숨바꼭질 하듯 불륜의 데이트는 어느새 꼬리를 잡혀 결국은 이혼을 하고 단란한 가정을 깨뜨리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결과로 끝을 맺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음란의 쾌락에 물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짧은 기쁨의 대가로 치루는 값비싼 비용에 대해 무지합니다. .......<중략>...... 한 순간의 숨 막히는 쾌락의 대가로 그동안의 안락하고 행복한 인생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행위로 평생 후회와 자책감에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달콤한 유혹과 쾌락이 이처럼 엄청난 결과를 잉태하는지 모르고 저지른 무지하고 어리석은 행위 때문입니다.
[2월 8일] 거룩하신 생명의 말씀 '복음' <마르 6,53-56>
[오늘의 묵상 - 신은근 바오로신부님, 마산 호계성당]
[복음]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동네방네 소문을 냅니다. 어떤 병도 고쳐 주시는 ‘그분’께서 오셨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병든 이를 들것에 눕혀 그분께 데려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듯 민중과 예수님의 만남은 치유를 통한 접촉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낫게 하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청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예수님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체 앞에서 삶의 아픔을 말씀드리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기에 하지 못합니다. 기적을 어마어마한 무엇으로 여기기에 ‘못 느끼고’ 있습니다.
기적은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훈훈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를 선뜻 낫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하느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열었기에 그들은 뜨거움을 느꼈고,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면 ‘복음의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됩니다. 치유를 베푸셨던 ‘기적의 그분’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적인 영성체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가끔은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문득 영혼의 힘과 생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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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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