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깊은 데로 가라 ....... 김상조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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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광자 | 작성일2010-02-09 | 조회수612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첫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장면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이동한 경로를 짚어보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로 가서 전도하시고 그 다음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그 다음 가파르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들르신 다음날 외딴 곳으로 물러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제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어느날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면서 찾아온 군중들을 가르치시다가 시몬 베드로의 배를 타고 많은 고기를 잡게 해주신다.
거기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 마음을 모아본다.
그분이 주로 머무신 곳은 “외딴 곳”으로 나온다. 갈릴래아 나자렛 가파르나움 겐네사렛 호숫가 등등. 이런 곳은 수도 예루살렘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다.
그분이 “외딴 곳”에 계시면서 주로 하신 일은 복음 선포와 묵상과 기도였다. 그리고 수도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중심부에서 하신 일은 십자가 제사였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분부는 열매를 거두기 위한 장소를 암시하는 것 같다. 열매를 거두려면, 결실을 내려면 중심부로 가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 마음의 중심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분 마음의 중심에 다가가야 비로소 참으로 그분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 마음의 중심에는 뭐가 있을까? 사랑?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분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달콤한 것만이 아니다. 그분에게는 십자가 죽음도 달갑게 여길 수 있는 한없이 넓은 사랑이지만 우리는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분 마음의 중심에 있는 사랑은 십자가, 죽음을 통한 사랑이다. 사람들이 흔히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게 만드는 그런 사랑이다. 오직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 말대로 하는 것이 이렇게 십자가로 다가올 때 우리는 엄청난 혼동을 느끼고 흔들리게 된다. ‘어떻게 이걸 받아들이란 말인가?’
택도 아닐 것 같은 그곳,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곳, “깊은 곳”으로 가야 거둘 수 있는 열매. 그것을 예수님은 선택하셨고 우리에게도 권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보고 판단하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많은 일을 하시는 것 같다. 특별히 우리 인간들은 “실패”라고 생각하는 그런 곳에서 하느님은 “성공”을 이끌어 내 버리신다.
그러니 우리 마음을 조금 더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억울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그분은 그런 곳에서도 또 다른 “성공”을 준비하고 계실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말이다.
어느 여교사가 있었다. 이제 막 사범학교를 나온 한 한가씨가 발령을 받아 문제아반을 맡았다. 첫날부터 교실에선 싸움이 벌어졌다. 수업후 그 중 한명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으려 했지만 그 학생은 이렇게 말하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샘, 신경쓰지 마이소. 우린 저능아들입니다.”
여교사는 충격을 받았지만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다음날 칠판에 ‘스니제’라고 써 주곤 학생들이 읽게 하였다. 그다음 ‘제니스’라고 써주고 또 읽게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이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 여선생은 어릴 때 지독한 난독증에 걸려서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저능아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교사가 되었습니까?” 여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그 별명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우둔하지 않았고, 배우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지. 지금 너희들의 마음 자세가 너희들의 미래모습이라고 난 믿는다. 만일 너희들 중에 저능아라는 별명을 좋아하는 학생이 있다면 이 순간부터 그 학생은 우리반 소속이 아니다. 반을 바꿔라. 이 교실 안에 이제부터 저능아는 한 명도 없다.”
학생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배우려고 했다. 저능아가 아니라는 인식이 그들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두들 훌륭히 졸업하였고, 몇몇 학생은 대학에 진학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능력이 중요한게 아니다.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오늘 베드로가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깊은대로 가서 그물을 쳐라”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이렇게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다. 한 마디로 못난이들의 주님이시다. 바보들의 주님, 병신들의 주님, 저능아, 문제아들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은연중에 다툼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믿어줄 것인지, 베드로: 믿어서 손해보지 않을지.... 누가 승자일까? 둘 다 승자이다. 예수님은 당신께 신선한 충격을 받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될 베드로를 얻었고, 베드로는 상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인물을 만났다. 그 만남의 출발점을 이룬 것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제안이었다. “깊은대로 가서 그물을 쳐라”
물이 깊은 곳, 그곳은 알 수 없는 곳이다. 보이지 않고 짐작하기도 힘든 곳,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 혹은 심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기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으로 한 번 가보라는 초대. 그래서 감히 함부로 들어가볼 엄두가 나지 않는 곳, 그곳에 한 번 들어가 보라는 초대 같다. 그것은 또한 일의 한 가운데, 일의 중심, 만남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보라는 초대인 것도 같다.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만남을 가져보라는 초대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 심한 경우에는 신앙심마저 사라져 버리고 아무 위로가 없는 그곳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이 우리를, 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이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베드로처럼 너무 엄청나서 피해 달아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간다면 예수님의 다음 초대가 일어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사람을 낚으시고자 한다. 여기서 다시금 새겨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을 가진 우리 자신 조차도 아직까지는 완전히 하느님의 사람이 되지 못한 때가 더 많다.
베드로가 초대 받은 사람 낚는 일은, 먼저 베드로 자신부터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났다. 세 번 이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 떼고 배신하는 엄청난 실수를 통해서 비로소 그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만한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깊은 데로 가거라”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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