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2.10 수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축일
호세2,16.21-22 루카10,38-42
"필요한 것 한 가지"
전날 하루 휴가를 내어
멀리 산청 산골에서 요양 중인 형님을 문병했습니다.
길에다 시간을 다 쏟다보니
정작 형님과 만난 시간은 20분 남짓 이었습니다만
강렬한 깨달음은 잊지 못합니다.
짧은 20분 이었습니다만 할 일은 다하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1시간 혹은 2시간
…많은 시간을 머물다 와도 지나면 참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삶과 죽음도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년을 살았든 40년을 살았든 70년을 살았든 80년을 살았든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막상 세상을 떠나려 하면 참 짧게 느껴질 것입니다.
손님으로 방문했을 때
적절한 때 떠나야지 마냥 오래 머물러도 누가 되듯,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세상 손님으로 잘 머물다 적절한 시기에 떠나야지
너무 오래 머물러 살아도 어려움이 참 많을 것입니다.
꼭 20분 만나고 온 시간이 꿈처럼 느껴지듯,
형님 역시 20분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여 많은 이들 삶을 허무한 꿈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이래서 사랑입니다.
사랑 없을 때 삶은 그대로 허무한 꿈입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생생한 현존감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허무한 꿈같은 인생을 의미 충만한 인생으로 바꿉니다.
더불어 난 생각은
‘돈 없으면, 시간 없으면 사랑도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어 형님을 방문할 수 있었지
돈 없고 시간 없고, 사랑뿐이었다면 형님을 방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 없어, 시간 없어 사랑 못한다는 것은 핑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돈도 시간도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나라 방방곡곡에 잘 난 길을 보면서
마치 전 국토란 몸에 핏줄 같은 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의 작은 실핏줄들처럼 곳곳에 잘 난 길이었습니다.
사람 몸의 핏줄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여 온 몸이 살 수 있듯이
나라의 핏줄과 같은 길들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 같은 사랑과 돈이 골고루 배분돼야
유기체와도 같은 온 국민이 건강할 수 있겠구나 하는 묵상도 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지친 몸을 이끌고
사랑에 목말라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십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마리아는 주님의 심중을 꿰뚫어 알아채고
그분의 발치에 앉아 그분께 코드를 맞춰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사랑의 친교를 나누며 환대합니다.
이런 주님과 사랑의 친교만이
허무한 꿈같은 시간을 충만한 시간으로 바꿔
지금 여기의 현실을 깨어 살게 합니다.
마르타 역시 주님을 사랑했지만
주님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지 못해
주님께 코드를 맞추지 못하고
자기 식 사랑으로 음식을 준비하며 주님을 환대합니다.
다음 말씀은 마르타는 물론
주님께 코드를 맞추지 못하고
제 좋을 대로 열심히 사는 모든 마르타들을,
활동가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믿는 이들 누구나에게 꼭 필요한 것 한 가지,
택하여할 좋은 몫은 바로 주님과 사랑의 친교뿐입니다.
자주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께 코드를 맞춰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꿈같이 허무한 인생이 아닌
의미 충만한 사랑의 인생을 삽니다.
1독서의 호세아 역시 이 사랑의 진리를 깊이 깨달은 예언자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자신을 배반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 사랑으로 승화시켜
우상숭배로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깨달으라고 호소합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맞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바로 이게 호세아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배반한 아내를 용서하는 자신의 사랑에서
배반한 당신 백성을 용서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으니
바로 이게 호세아의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알 수 있고
또 이웃에게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해가면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이웃을 아는 것뿐입니다.
이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녀 스콜라스티카 ‘기도의 대가’이자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오빠 성 베네딕도를 능가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대종의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다음 일화입니다.
죽음을 예견한 스콜라스티카가
오빠와 긴 영적담화 시간 갖기를 원했지만
이런 여동생의 간청을 냉정히 뿌리치고
떠나려는 베네딕도의 길을 막은 것은
순전히 스콜라스티카의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스콜라스티카의 간절한 기도 후
난데없이 쏟아진 번개 천둥을 대동한 장대비가
베네딕도의 발을 묶었고
그들은 서로 영적생활에 대한 성스러운 대화를 마음껏 나누면서
온 밤을 지새웠다 합니다.
이런 스콜라스티카의 사랑에 대해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극히 공정하게 판단하더라도
더 많이 사랑한 스콜라스티카가 더 능력이 있었다.’
결국 기적도 마술적인 게 아니라,
사랑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베네딕도 성인의 모든 기적들 역시
복음의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들처럼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일어난 것들임을 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발치에 앉아 마리아처럼
주님과 사랑의 친교를 깊이 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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