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2.11 연중 제5주간 목요일(세계병자의 날)
열왕기 상11,4-13 마르7,24-30
"참 종교, 참 신앙인"
포장이 좋다고 내용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 종교의 포장을 개봉했을 때
참 좋은 사람들이 있어야 참 좋은 종교입니다.
과연 종교라는, 신자라는, 수도복이라는 포장을 벗었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러니 종교의 포장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포장의 시대입니다.
온갖 화려한 포장과 가면들의 환상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과 관련되어 마음에 와 닿은 구절들을 나눕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마련하겠다는 말이냐?
모두 내가 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다 나의 것이 아니냐?”
하늘과 산의 자연이 그대로 하느님의 성전인데
새삼 무슨 거액을 들여 성전을 짓느냐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내용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성전의 외관을, 포장을 넘어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진실을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또 계속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나, 주님만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역시 하느님은 가면과 포장을 꿰뚫어
그 마음의 진실을, 순수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다음 말씀도 생각납니다.
“피조물치고 하느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모두가 우리의 포장과 가면을 벗겨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내 세우는 주님의 말씀들입니다.
종교까지 상품화되는 시대입니다.
세속의 사업체처럼 교회 역시 대형화, 포장화 되는 추세입니다.
세속화와 더불어 성직자들 본연의 자세도 변질 퇴색되어
적지 않은 이들이 세일즈맨이, 비즈니스맨이, 사업가가 되어갑니다.
종교의 포장을 보시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초심의 자세로 항구하기는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자기가 지은 성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간절한 기도를 바치던 솔로몬이
오늘은 말할 수 없이 타락한 모습니다.
솔로몬의 종교 포장은 좋아 보이기 이를 데 없지만
포장을 열어보면 하느님의 자리에
이방의 우상들이 가득하여 악취가 진동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산산이 갈리어 있으니
나라가 분열될 것은 너무 자명합니다.
이방 여인 아내들과 더불어 따라 들어온 우상들이니
자기 신앙 관리에 완전히 실패한 솔로몬임을 봅니다.
다음 구절들은 타락한 솔로몬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의 마음은 아버지 다윗의 마음만큼
주 그의 하느님께 한결같지는 못 하였다.”
“이처럼 솔로몬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 다윗만큼 주님을 온전히 추종하지는 않았다.”
“주님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다.
그의 마음이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하느님 대신 재력, 권력등
온갖 우상을 섬기며 마음은 갈라져 타락해 간 솔로몬입니다.
교회나 수도회 역시
재력이나 권력 등 우상들에 현혹되어 세속화 되어갈 때
어김없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여 수도원들의 쇄신은 언제나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세속화에서 사막의 '고독'을 향했습니다.
하느님은 종교의 포장을 보시는 게 아니라
사람의 속마음을, 간절하고 순수한 믿음을 보십니다.
오늘 복음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부인,
솔로몬과 비교할 때 그 종교의 포장은 얼마나 별 수 없는지요.
아니 포장이나 가면이 없는,
꾸밈없는 간절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신 주님이었지만,
이런 간절한 믿음을 지닌 부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부인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주님이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간절한 믿음일수록 주님을 알고 기도는 짧으나 정곡을 찌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간절한 믿음의 겸손과 가난의 밑바닥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항구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청할 때 주님은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이교도 여인에 대한 주님의 즉각적인 항복 선언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주님의 일방적인 기적은 없습니다.
부인의 간절한 믿음에 대한 주님의 구마의 응답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온갖 포장과 가면을 벗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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