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며, 참회와 보속 그리고 희생의 정신으로 지낼 것을 권고한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킨다. 금식은 만 18세부터 60세까지 지키며, 금육은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그리고 제의 색깔은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자색으로 바뀌며, 전례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은 생략된다.
초기 원시 교회에서는 사순 시기가 없었고,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파스카 삼일’ 예식만 있었다. 박해 시기를 거치면서 부활 대축일의 준비를 위해 회개와 보속의 기간이 생겨났다. 사순 시기가 40일로 정착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결정이며,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 그레고리오 1세 교황 때부터였다. 특별히 이 시기는 예비 신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마지막 기간이었으므로 더욱 경건하게 지냈다.
‘40일’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한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 동안 재를 지켰고, 엘리야 예언자도 ‘호렙 산’에 갈 때 40일을 걸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뒤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사순 시기 동안 희생과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신자들은 이 기간 동안 지난날의 잘못을 돌아보며 계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스스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기회를 자주 마련한다. 이렇게 사순 시기의 특별한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 특별히 ‘십자가의 길’ 기도를 자주 바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생활 속에 자신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된다.
오늘부터 사순 시기가 시작된다. 사제는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는 ‘자색 제의’를 입는다. 미사 전에 주례자는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한다. 사람의 출발이 흙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재의 수요일’은 이 예식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했던 나뭇가지를 태운 것이다. ‘재를 머리에 뿌리는 것’은 전통적인 참회의 상징이다. 오늘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킨다.
<복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옛날 연나라에 활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활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연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연나라 사람이 주울 것인데, 굳이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연나라라는 말을 뺐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노자께서 공자의 말에 토를 다셨습니다. “사람이라는 말까지 뺐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자선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행동입니다. 남이 알게 하면 자선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그런데도 자선이란 명분으로 ‘자기를 선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복음 정신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자선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갚음을 바라지 않고 베풀면 하늘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밝아지는 인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속담에도 “적선하는 이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만큼 하늘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먼저입니다. 무의식중에라도 좋은 생각을 자주 해야 합니다. 선한 마음이라야 조건 없이 베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