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괴 성모님 순례지 김웅열 신부님
봄을 위한 메인
돌아온 아들, 그 이후.....
†찬미예수님
사제로 살면서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던 많은 일들이 어느 사제든지 다 있을 겁니다.
아주 오래전에 참으로 생각하기 괴로운 일이 하나 있었는데....
냉담교우라고 밝힌 어느 아가씨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그 아가씨가 울면서 나에게 얘길 했죠.
열여섯 살 때 가출을 해서 십년동안 술집과 다방과 창녀촌을 전전하며 다니다가 고향의 청년과 혼담이 오고가면서 결혼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딸이 서울에 가서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일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27살, 시집갈 때가 돼서 동네 청년과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직장에 착실히 다니는 줄 아는 그 남자에게 과거를 밝힐 수도 없고
속이고 결혼한 후에 일을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지만
분명히 언젠가는 어두운 과거가 밝혀질 것인데
그때의 파장을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스럽던 과거를 영원히 숨긴 채 남편을 기만하면서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할 것인가?
고민 고민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고
어릴 때 다니던 성당이 생각이 나서 114에 전화를 걸어서
‘아무성당 전화번호나 좀 알려주시오. ’
했더니 그 교환수가 푼수를 떨었지요.
그 많은 성당가운데 하필이면 내가있는 성당 전화번호를 알려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성당 사제관에 전화를 걸어
죽기 전에 아무 신부님한테라도 털어놓고 죽고 싶어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장난전화인가 하고 상황을 분석을 해 보았지만
울면서 마지막을 가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신부님 저를 말릴 생각 마시고 기도나 해주십시오. 자살하면은 지옥에 간다는 것은 제가 배워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도해주십시오!”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는 다해 보았지만 여전히 냉랭하게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며칠 뒤에 우연히 지방 신문을 보았는데 거기에 [결혼비관 자살]이라는 제목과 자살하게 된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아가씨가 분명했습니다.
‘결국엔 자살하고 말았구나!’
너무너무 괴로워서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저는 그때 사제로서의 한계를 느꼈으며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죄의식이라고 하는 이 어두움이 그토록 한 영혼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저는 죄의식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한번 돌아와 봅시다.
수많은 영성학자와 문학가.....
그들의 잉크를 흘리게 했던 복음 중에 복음이고, 비유 중에 비유이며, 설교가들의 단골 주제로 세상 곳곳에서 설교되었던 <탕자의 비유> 다른 말로 해서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묵상해봅시다.
이 비유는 사실 그 보물이 너무나 많이 묻혀있기 때문에 그 묵상의 범위가 한도 없이 넓습니다.
그래서 제 강론테이프 가운데도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가 두 시간 이상 강론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관점, 큰아들의 관점, 작은 아들의 관점, 심지어는 억울하게 죽은 살진 송아지의 입장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묵상을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좀 색다른 방향에서 묵상을 하고자합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영원히 평화로울 수 있었을까!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기쁘게 맞이했고, 가락지와 옷과 신발을 신겨주고 즐거워하고 큰아들은 그것이 못마땅해서 투덜거리면서 아버지가 달래는 장면으로 성서는 끝이 납니다.
저는 그 뒤의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에게 전화를 걸고 죽은 자살한 그 아가씨 때문에......
그 죄의식이라고 하는 거 때문에.......
상상을 해봅시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왔으니, 즐거운 일이요, 축하할 경사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과 축제의 시간은 지나가고 실제적인 현실이 작은아들에게 다가옵니다.
작은아들에게는 정신적인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죄와 허물, 양심의 고발이 그를 분명히 괴롭혔을 겁니다.
육에 속했던 옛 생활의 향수가 그를 가끔 유혹했을 겁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안의 분위기도 결코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형님의 싸늘한 눈초리였을 겁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돌아온 탕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첫 번째로 바로 정신적인 열등감
우리들은 과거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괴롭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했던 죄!
허망하고 방탕하고 교만하고 방자했던 죄와 허물 때문에~~
괴로워하고 불안에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낙태시킨 죄에 대한 그 죄의식 때문에 자매들은 한평생 그 죄의식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하고 싶어도 부끄러움 때문에 죄의식만 가지고 고백소에 가서 전전긍긍.....
딴 얘기만 하다 나옵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 죄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오늘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에게 뭐라고 그랬습니까?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할 때
하느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거’ 하느님은 나 같은 죄인도 끌어안으신다는 거를 믿어야 됩니다.
마귀라고 하는 놈은 어떻게 해서든지 영적열등감으로부터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을 못시키게끔 최선을 다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열등감인 이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고백성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죄 사함의 보증을 못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사제의 입을 통해서 ‘너의 죄가 사함 받았다.’ 고 하는 보증을 확실히 주십니다.
서울의 어느 본당에 현재 총회장님으로 계신 회장님이 있는데
이분은 이십 여 년 전에는 개신교에서 장로노릇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직업이 정신과 의사였었습니다.
논문을 쓰는데 하나가 걸렸습니다.
천주교의 고백성사에 대해 논문을 쓰다가 그것을 짚고 넘어가야 되는데
개신교신자입장에서 천주교의 고백성사를 알래야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 고백소 앞에서 6개월 동안 진을 치고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들을 관찰을 했습니다.
죄에 찌들려 고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하나같이 다 얼굴이 어두웠지요.
정신과 의사로서 그는
‘아, 저 사람의 얼굴을 봐서는 적어도 내가 이년은 치료해야 될 사람이다.
아, 조 자매는 적어도 육개월은 내가 치료해야 될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희한하게 그 쪼끄만 골방에 들어갔다 나올 때는 얼굴이 천사얼굴이 돼서 나오더라.....도대체 저 쪼끄만 골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들어갈 때는 마귀의 얼굴이었는데 나올 때는 천사의 얼굴로 변해서 나올까!!!’
곁에서 지켜만 보고서는 알 재간이 없었습니다.
‘방법이 없다. 내가 개종을 하자!’
6개월 동안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첫 고해를 하는 날, 자기도 하루에 사람을 수십 명씩 만나는 카운슬링 전문가인데 고백소 문을 열기 전부터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컴컴한데 무릎을 꿇으니 사제가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어슴푸레하게 그 신부님의 모습이 안에 이렇게 보였습니다.
그 안을 어슴푸레하게 봤을 때....
거기에 신부님만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옆에 서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 회장님은 그때부터 눈물, 콧물이 터지면서
자기가 한평생 지었던 죄를 정말로 울면서 통회를 했고~~
사제로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하나이다!”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천국이 따로 없구나! 바로 이렇구나!
바로 이것 때문에 그토록 천사의 얼굴이 돼서 나올 수 있었구나.....
개신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골방에 들어가서
“주님!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나 실컷 울면 속은 시원해져서 고 순간에는 죄 사함을 받은 거 같지만
보증이 없습니다.
귀에다 대고 ‘니 죄 사함 받았다!’ 라고 하는 그러한 말을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늘 내 죄가 정말 사함 받았는가?
그건 자기 생각뿐이지....
죄 사함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조차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그리고 땅에서도 매여 있으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는 채로 그대로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는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릴 것이다.>
열등감은 죄의식에서 옵니다.
이 열등감은 영과 육을 병들게 합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죄를 사해주는 종교는 가톨릭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로 성사를 봐야 됩니다.
회개를 통해서 치유를 받고, 사제의 입을 통해서 치유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고백성사입니다.
우리가 죄의식 때문에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지 않고 좋은데 가도 기쁨이 없습니다.
그 죄의식은 버러지처럼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래 주님 앞에 가서 용서를 청하자!>
이것 밖에 살길이 없다는 거지요.
두 번째, 우리가 묵상해야 될 것은
돌아온 탕자를 괴롭혔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는 육에 속했던 옛 생활에 대한 유혹 이였습니다.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회개해서 딴 길로 들어섰어도 살다보면 옛날에 방탕했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몰랐던, 세상 것을 우상숭배하고 살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자들 가운데서도 세례 받고 난후에도 30프로 이상이 살면서 점을 쳐보거나 철학관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세속, 육신, 마귀 이 삼고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둬야 됩니다.
이 몸뚱아리를 건드리는 가장 큰 유혹은 죽을 때까지....
지금 이 시대에는 아마 性的 유혹일겁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에집트로 팔려갔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집요한 성적유혹을 당합니다.
그럴 때 요셉은 네 가지 영적무기를 가지고 물리칩니다.
첫 번째로는 자기의사를 정확히 표현합니다.
“싫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싫습니다!”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내가 의지가 약해서 죄에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나약함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나약함속에 자기 자신을 내팽개쳐두기 때문에 죄에 떨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우둔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마지막 죄에 떨어지기 전에 결정능력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에 “싫습니다.”하고 자기의사를 밝힙니다.
특히 성적유혹만큼은 중간이 통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의사를 밝혀야 됩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요셉을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썼던 영적무기는 멀리하는 거였습니다.
촛불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손가락이 탈 확률은 커지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에 델 확률은 적어집니다.
유혹을 물리치자!
하면서도 유혹의 기회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촛불에다 손가락을 대면서 불에 타지 않기를 바라는 거와 똑같습니다.
음란잡지나 포르노를 보면서 순결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인간은 없습니다.
멀어져야 됩니다.
어떤 화면이 내 영혼을 어지럽히면 그거로부터 끊어야 됩니다.
멀어져야 됩니다.
멀어지는 것 가지고도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로는 요셉의 옷을 잡고 침실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때 요셉이 썼던 세 번째 무기는 도망치는 거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유혹은 저항해야 되지만 성적유혹만큼은 저항하면 할수록 걸려듭니다.
성욕이라고 하는 이 거대한 괴물을 과연 우리들이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도망쳐야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 보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기도는 유혹이 저만큼 앞에 있을 때 하는 기도지 이미 내가 유혹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을 때는 그 기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야 됩니다.
요셉은 겉옷을 유혹자에게 넘겨주고 순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영적무기는 앞에 세 가지를 다한다하더라도 네 번째 영적무기가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성적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우리가 솔직히 몰라서 죄에 떨어집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의 욕정을 가라앉히고 무질서한 마음에 자리를 잡아줍니다.
요셉은 이 네 가지의 영적무기를 가지고 자신의 영과 육을 지켜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창녀한테 빠져서 쾌락을 즐겼던 바로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엄청난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우리들도 똑같이 그런 유혹이 옵니다.
바람을 피다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이제는 그 삶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러나 신자생활을 하더래도 마귀라고 하는 놈은 사람 안에 몸뚱아리를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특별히 술마귀와 음란마귀는 동시에 친구처럼 같이 찾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다 보면은 음란죄까지 같이 짓게 됩니다.
그래서 술마귀와 음란마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라고 그럽니다.
강하게 구마기도로써 물리쳐야 됩니다.
세 번째로 이 탕자를 괴롭혔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형과 같은 싸늘한 시선에 짓눌리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뜨겁게 환영하지 못하는 형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형이 다 틀렸다고 자포자기하는 동생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형이 싸늘하게 따뜻이 대해주지 못 한다고 해도 꾸준히 인내를 갖고 형에게 잘 하면은 형도 변할 겁니다.
우리들은 키 작은 자캐오의 이야기를 압니다.
자캐오는 돈도 있고 권력도 있었지만은 같은 동족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캐오가 배반을 했지요.
돈도 필요 없었습니다.
가슴은 늘 뻥 뚫려서 찬바람이 휭휭 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인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는 예수님이 자기 동네로 찾아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러 나갔지만 키가 워낙 작다보니까/ 그 키 큰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고/ 또 자캐오가 온다고 막 팔꿈치로 치고 그러다보니까 예수님을 만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군중이래든지 자기 앞을 가로막는 그 키 큰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뽕나무위로 올라갑니다.
다시 말하면 자캐오는 자기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하느님 앞으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작은 아들은 동네사람들의 싸늘한 시선, 형의 빈죽거리는 말, 분명히 들을 각오해야 됩니다.
동네사람들도 ‘저놈 저거 몇 달 견디지 못할 거야. 또 돈 훔쳐가지고 나갈 거야.’
또 형은 들어와서도 말 한마디 동생에게 건넨 적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연한 보속이라고 생각하고 내 환경을 원망하지 말고 끝까지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저에게 전화를 걸고 자살했던 한 아가씨 그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창녀촌을 전전하면서 과연 이런 더럽혀진 몸뚱아리를 가지고 처녀인척 어떻게 내가 동네 청년과 결혼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죄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을 파멸시킵니다.
우리들은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을 믿고 하느님 앞으로 나갑시다.
그리고 성사를 보고 피정을 하고 깨끗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유혹은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강하게 물리칩시다.
살다보면 내 맘 같지 않아서 주변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꾸준히 인내로써 살아가다 보면 탕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식으로 거듭 날것을 믿습니다.
아멘!
♧느티나무신부님ㅡ2007. 3. 18 (사순 제4주일) 가르침
산비둘기 새끼 두마리-photo by 느티나무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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