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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 탈렌트도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9 조회수469 추천수8 반대(0) 신고
 
 
 

만 탈렌트도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 윤경재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23-30)

 

 

마태오 복음서에서 나오는 비유 내용은 그 단위가 너무나 엄청나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일만 탈렌트라고 하면 그 양이 어느 정도인지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노동자가 하루치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일만 탈렌트는 육천만 일의 품삯입니다. 그러니 일만 탈렌트는 물경 십육만 사천삼백팔십삼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헤로데 성전을 지었던 헤로데 대왕이 유대 백성을 다그쳐 일 년에 거두어들인 세금 수입이 구백 탈렌트라고 했으니 십일여 년 수입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마태오 복음 저자가 유대인이라서 그들의 성품대로 과장이 너무 심해 이렇게 뻥을 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잘 새겨 보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크기도 아닙니다. 여전히 측정 가능한 크기일 뿐입니다. 유한한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면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과거의 잘못은 다 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더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거나 과거에 매달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용서 받을 대상과 용서하는 자가 과거를 단절하고 미래의 시간으로 한 걸음 내딛는 행위입니다. 

예레미아 31장 31-34절을 보면 주님의 용서에 대한 정의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용서는 옛 행위를 더는 기억하지 않는 일이며 새로운 관계, 새 계약으로 맺어지는 일입니다. 소외된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상태가 바로 용서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옛 것에서 매달려 미래를 잃는 어리석음입니다. 미래의 전망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그 한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깊고 크고 넓은 그 무엇입니다. 

인간은 기억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사실 기억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는 꼭 필요합니다. 생활의 안정과 안전을 보장해 줍니다. 언어라든지 관습이라든지 하는 것은 기억에 의존합니다. 기억은 생활의 편리함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치게 기억에 의존해 살아왔습니다. 기억을 지식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하여 금과옥조처럼 받아드립니다. 기억의 한계를 무시하고 살아왔습니다. 

다행히 현대인은 기억의 한계를 깨닫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기억이라 하면 누구도 컴퓨터를 따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는 수십 권의 백과사전의 내용을 조금도 착오 없이 재생해 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I.Q.가 높아도 백과사전을 전부 암기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때 필요한 지식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이 세상에 없던 내용을 창조해 내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 세상에 기억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니, 사랑이니 하는 것과 죽음이라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런 것들은 기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미래로 자신을 개방할 때 비로소 무엇인가 작은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을 뿐입니다. 기억에 매달렸다가는 도저히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자유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문제는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런 것들은 미래를 받아들인 자에게만 어슴푸레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생은 개방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닫힌 시간, 즉 과거에서 벗어나 측량할 수 없는 시간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살아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미래를 이야기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미래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한 마디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미래라는 시간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용서를 체험한 자는 미래를 엿본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용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의 기도에서 용서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주님과 동시에 인간도 펼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 마땅한 일입니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일을 맛보고 실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입니다. 

마태오 복음 저자는 그 용서의 기쁨을 만 탈렌트라고, 한계 지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비유로 말했습니다만, 실제로 용서의 크기는 그보다 더욱 커 도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만 탈렌트는 오히려 새 발의 피라고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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