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4주일 본문+해설+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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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 작성일2010-03-10 | 조회수37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낸다.>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4(33),2-3.4-5.6-7(◎ 9ㄱ) ◎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주님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이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 ○ 너희는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주님 이름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도다. ◎ ○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루카 15,18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루카 15,32 참조 아들아,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하지 않느냐.
해설과 묵상
제1독서(여호 5,9ㄱ.10-12) 해설 <하느님의 백성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해방절을 지냈다>
이 대목은 여호수아기 첫째 부분에 속한다(1-12장). 이 부분에서는 약속된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석가들은 이 대목의 전례적 성격을 강조한다. 히브리인들은 요르단을 통과하여 약속된 땅을 향해 진군하며(3-4절), 예리코 평야에서 첫 해방절(파스카)을 지내고 할례를 받았다(5절). 예리코를 정복한 날을 기념하여 축제를 지냈다(6절). 그러나 여호수아기는 단순한 정복 이야기가 아니라, 약속된 땅에 관한 신학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같은 관점에서 오늘 독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 과정이 끝나고 이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출발의 순간을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고 있다. 1. 히브리인들에게 행한 할례(5,2-9) 이 할례는 모세 자신이 자기가 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자기 아들에게 행한 할례를 떠올리게 한다(탈출 4,24-26). 저자는 아마 이집트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2. 해방절 축제(5,10-11) 이 축제는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맨 처음으로 지낸 해방절을 돌아보게 한다(참조. 탈출 12). 3. 내리던 만나가 그친다. 이제 히브리인들은 약속된 땅을 가꾸어 그 소출로 먹고 살아야 한다(5,12). 이상 세 가지 요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에서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정해 준다. 그 기능이란 율법에 순종하고(할례가 그 표시 가운데 하나다.), 해방절의 절정인 경신례를 바치며, 땅을 잘 가꾸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출되고 해방된 우리 모든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제인 파스카축제(해방절 기념제)를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고 명하신 계명을 충실히 지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땅의 소출을 골고루 나누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한다.
화답송(시편 34[33],2-3.4-5.6-7[◎ 9ㄱ]) 해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가엾은 사람들을 그 모든 궁핍과 고통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분이시다. 가진 것 없는 가엾은 사람들이라야 하느님을 향하여 애원하고 간청하며 구출하여 주시기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스스로 자만하여 잘난 체하며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야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간청하는 사람에게만 내려진다. 즉, 구원은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내려진다는 말이다.
제2독서(2코린 5,17-21) 해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몇 구절뿐이지만 이 대목은 의미가 깊다. 바오로는 여기에다 그리스도론적 신비를 모두 담는다.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이 나온다(18.19.21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세상과 화해를 이룩하셨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그 화해를 무효로 만들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죄인 취급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십자가 형틀은 실은 우리가 져야 할 사형 틀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노가 내려지는 날’이다(참조. 아모 5,18-20; 이사 2,12 이하; 스바 1,14-18; 요엘 2,11 등). 이제 십자가는 죄악이 용서받고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했음을 나타낸다. 거기에서 두 가지 결과가 나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해가 아닌 다른 것을 세상에 선포해서는 안 된다(18,20절). 그리고 모든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20절).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그 화해를 이루어 주시도록 간청해야 하며 ‘옛 사람’을 벗어던지듯 청산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새 사람’으로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
복음(루카 15,1-3.11-32) 해설 <네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
오늘 복음에서 다음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이 비유는 죄인들과 더불어 밥을 함께 드시는 예수님과 그것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 및 율법학자들을 대조한다(1절과 2절).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이 품고 계신 생각과 마음과 입장을 밝히신다. 그 죄인들은 자기들의 무능력과 비참함을 절절히 깨닫고 인정하면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굶어 죽는구나!”(17절). 한편 세리들도 물질적으로 먹고 살 만큼 넉넉하지만 모진 비난과 멸시를 받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을 보지 않고 마음속 깊은 데를 헤아리고 판단하는 분이므로 그들을 죄인으로만 취급하지 않으신다. - 스스로 떳떳하고 죄진 일이 없다고 자신하고 자기는 천당 입장권을 이미 따놓은 것과 다름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무식하다고 무시와 천대를 받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예수님과 친해질 수 없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그 누구도 당연한 권리처럼 아버지 집에 들어갈 수 없음을 설명하신다. 아버지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이들만이 은총으로 그 권리를 받는다.
묵상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오늘 복음은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기 싫다고 떠나간 사람에게 밀어닥친 비극적인 상황을 알아듣기 쉬운 감동적인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쓰디쓴 허탈감과 정신없이 쫓기는 불안과 고뇌, 그리고 어지러운 사회생활 안에서 고독과 절망을 벗어날 길이 없다. 하느님 아버지 없이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칫 방탕과 범죄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깊이 깨닫고 뉘우쳐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헤아려서 따르는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유일하신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을 때 위대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온갖 노력은 아귀다툼으로 변하고 만다. 또한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라는 사실 외에 그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다거나 자신을 내줄 수가 없으며, 형제자매인 사람이 내게 낯선 타인으로 남고 만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하루에도 십만 명씩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고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도 나와 내 가족만 편안하면 그만이다. 하루빨리 아버지께로 돌아가 당신을 모시고 모두 함께 형제자매로 살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초대하신다. 지금까지 과거가 어찌되었든 깨끗이 잊고 과감히 돌아서서 당신과 더불어 아버지께 가자고 부르신다. 다시는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따뜻하게 손잡고 똑같은 형제자매로서 아버지께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초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과거가 아주 더럽고 잘못되었을지라도 눈물을 흘리시며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신다. 이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꾸 비뚤어져 가고 있는 아들일지라도 그 아들이 한시바삐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바른 사람이 되기를 빌며 기다리고 있는 심정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모범적인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이 쏠리는 쪽은 비뚤어져 가는 아들 쪽이다. 어진 아버지는 이미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있다. 나약하기에 죄를 범하기 쉬운 우리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복음인가? 하느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려고만 하신다면 당해 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와 용서로 서로 감싸 주며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삶의 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우리가 잘못된 길에 떨어졌을지라도 그렇듯 애타게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어 잘못된 생활방식을 뿌리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을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로 여기며 그리스도께서 형제자매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의 죽음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잘못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러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갈 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올바른 삶의 길이 방향 지워질 것이다.
복음해설(2)
자비심에 관한 비유(15,1-32) 이 장(章)은 주제상 그리고 편집상 하나의 단원으로 제시되어 있다. 주제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다. 편집자는 특정 인물들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세리들이나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판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이다. 예수께서 연설을 하실 때 그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현장에 있었다. 루카는 다시 찾거나 만나서 기쁨을 맛본다는 관념을 통하여 이 장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참조. 7.10.24.32절. 그러나 16장이 시작하면서 청중이 바뀐다.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ㄱ) 이야기하는 식으로 들어가는 말이 나온다(1-3절). ㄴ) 세 가지 비유, 즉 잃어버린 양의 비유(4-7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8-10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11-32절)를 들어 예수께서 연설을 하신다. 그 가운데 앞에 나오는 두 가지 비유는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고, 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회개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11-32절)는 다음과 같이 펼쳐진다. - 상황을 설정한다(11-12절). -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을 나와 재물을 탕진하고 궁핍에 찌들기 시작한다(13-16절). - 작은 아들이 뉘우친다(17-20ㄱ절). - 아버지가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을 인자하게 받아들인다(20sㄴ-24절). - 큰 아들이 대든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와 대화를 나눈다(25-32절). 이 마지막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기쁨’과 ‘잃어버림/찾음’이라는 열쇠가 되는 낱말들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죽었음/다시 살아남”이라는 이중명사를 두 차례 되풀이한다. 1-3절: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참조. 5,30; 7,34). 이들은 모두 비종교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람으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세리 자케오의 경우처럼 흔히 그렇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 비판의 기초에는 유다인은 하느님을 모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 음식을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모두’라는 표현은 루카가 과장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4-7절: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세 비유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마태 18,12-14; 요한 10; 에제 34,11-16도 참조할 것). 마태오는 교회의 목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에 관하여 사도들에게 주신 여러 가르침 사이에다 이 첫째 비유를 배치한다. 그에 비해 루카는 왜 예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밥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드시는지를 묻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사용한다. 마태오는 ‘찾는다.’는 관념을 강조한다. 루카는 찾고 만나는 기쁨을 강조한다. 이 구절들은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잃어버린 양이 실망에 빠지거나 살기를 포기할 때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와야 한다.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대하는 장면은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은 이 장 전체에 들어있는 주제다(참조. 9,23-24.32절). 8-10절: 둘째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는 첫째 비유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둘째 비유에서는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또한 루카 복음서의 특색이다. ‘드라크마’는 그리스 화폐였다. 로마 총독들 시대에 한 데나리온과 같은 값이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에서만 그 화폐를 언급한다. 십 드라크마는 그다지 큰 액수가 아니었다. 여자가 한 드라크마를 찾으려 애쓰는 것은 그녀가 가난한 여자였음을 가리킨다. 이 비유의 목적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의 목적과 같다. 즉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앞 비유에서처럼(7절과 10절) 비유를 그처럼 우의화(寓意化)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죄인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과 더불어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의 설교를 통하여 한없이 펼쳐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11-32절: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 비유는 루카 복음서에만 나온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물려줄 ‘농장 몫’을 달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기 재산을 포기하고 자녀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1열왕 1-2; 집회 33,19-23). 작은 아들은 ‘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앞에는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은 저 아들’이라는 말이 없다. 뒤에 가서 큰 아들이 그런 말을 할 것이다. 작은 아들의 처지는 유다인으로서는 부끄러운 노동(불결한 동물로 여기던 돼지 치는 일)을 해야 할 만큼 비참하게 변하고 말았다. 루카는 게으른 부자의 비유에서처럼(루카 12,16-20) 독백으로써 자기 이야기의 극적인 효과를 키우는 습관이 있다. 여기에서 작은 아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한다(참조. 15,21). 젊은이에 관한 비유들에는 호세 2,9가 되울린다. 아버지는 멀리서 작은 아들을 알아보고, 마음속으로 이미 용서를 하고서, 달려 나가 그 아들을 만난다. 그런 모양으로 이 비유는 그 아버지의 태도를 사랑과 너그러움의 본보기로서 제시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정 반대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버지 집을 떠난 적이 없는 큰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아버지가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기뻐하는 모습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오랜 세월 아버지 말씀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착실히 따른 큰 아들로서는 그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다. 자기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일 생각은 꿈에도 없다. 시기심에 불타는 큰 아들의 그런 이기적인 태도를 보고, 아버지는 ‘애야’(‘아들아’, ‘테크논’) 하면서 부드럽게 대답한다. 큰 아들에게 동생이 돌아왔음을, 죽었다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 애쓴다. 이 비유에 나오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을 위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큰 아들은 바리사이처럼 말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루카 복음서에 따르자면, 예수님의 생각이 아니다(참조. 루카 17,9-10). 더구나 이 비유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한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완전히 합치한다. 가정의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아직 죄인으로 있을 동안에도 그를 사랑하신다. 그에게 뉘우칠 기회와 가능성을 주고 마음속으로 이미 용서하고 계신다. 먼저 용서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자세는 좁디좁은 우리 마음자세를 꾸짖는다. 그런 옹졸한 우리 마음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작은 아들의 확신에서까지도 드러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가져다주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으러 오신 분으로 나타나신다(19,10).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루카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들어가는 말’은 상반되는 기준을 가진 두 사람, 대화하는 두 사람을 제시한다. 한편에는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더불어 음식을 드시는’ 예수께서 계시고, 또 다른 한편에는 예수님의 처신과 행동을 비판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있다. 그 양쪽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가? 독자는 깊이 생각한 다음 답변을 내놓도록 초대받고 있다. ㄴ) 루카는 하느님의 태도를,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애타게 찾는 가난한 여인의 태도, 양 우리를 벗어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의 태도에 빗대어 제시한다. 하느님은 죄인을 버린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잠시 탈선한 당신 자식으로 여기신다. ㄷ) 탕자의 비유에서는 등장하는 세 인물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너그러움, 작은 아들의 철없음, 큰 아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알아차려야 한다. 아버지의 너그러움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탈선한 아들이 뉘우치고 돌아오자 한시도 잊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꾸짖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큰 아들의 모습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아들처럼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겹친다. 그런 신자들은 자기 형제의 잘못을 혹평하는가 하면 그런 형제가 차라리 집(신앙공동체)을 나가버렸으면 한다.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대가를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그런 신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초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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