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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의 유용성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3 조회수696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3주간 토요일 - 죄의 유용성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꼭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성인처럼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 4시간 자고 하루 한 끼만 먹고 그것도 고기는 먹지 않고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만 앉아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지금보다 20킬로 가량이 적게 나갔습니다. 이런 극기의 모습이 성인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었으며, 나중에 죽고 나서 교황청에서 하게 될 성인조사 작업에서 흠이 발견되지 않도록 남겨질 수 있는 오점들은 하나도 남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도 나를 완벽한 사람으로 착각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사니 칭찬해 주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서 스스로 참 잘 산다는 착각에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성인이 정말 될 것만 같았습니다. 또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잘 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신학생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철들게 해 준 것은 제가 일상적으로 짓는 죄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남에게 잘못하는 것이 없더라도 말과 행위와 궐함으로 짓는 일상적인 작은 죄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죄는 다음에는 꼭 고쳐야지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어느 새 계속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며 결국 겉은 거룩해도 속은 썩어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잘 보여 성인이 되려는 이런 모습이 마치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과 같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질이 변해야 하는데 겉만 잘 보이려 했던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 눈엔 죄인이어도, 하느님 보시기에 성인이면 그 사람이 성인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잊혀진 참다운 성인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교만입니다. 겉으로는 다른 잘못을 거의 하고 있지 않게 보여도 실제 그 사람의 본질적인 모습은 사람 흉내를 내는 원숭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죽어서 자신의 모습이 원숭이였다면 그만한 충격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본질을 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서 머리를 꼿꼿이 들고 당당하게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말 안에는 자신이 하는 일들로 당연하게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교만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리만큼 깨끗할 수 없고 또 절대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닌 주님의 은총에 의해 옵니다.

또 남을 판단하는 모습에서 교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자는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이 더 크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교만하게 기도하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주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당연히 오늘 주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세리는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그 잘못들로 인하여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 겸손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세리를 겸손하게 만든 것은 그가 지은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마리아 막달레나나 바오로 사도와 같이 자신이 죄인이었던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큰 죄를 안 짓고 교만하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하느님께는 우리가 무슨 죄를 짓는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통해 더 겸손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인간을 보시면서도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더 큰 목표는 그 죄를 씻어주는 당신의 사랑을 알고 당신을 더 사랑해주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의 회복은 죄, 즉 교만을 씻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무 죄를 안 짓더라도 교만하면 죄인이고 다른 죄를 지었더라도 겸손해 졌으면 이미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해성사 때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해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자체만으로 죄가 사해지기 시작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는 당연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도 합니다. 죄는 본질상 나쁜 것이지만 나의 나약함을 깨닫게 만들어 나를 더 겸손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도 싫지만 교만해지는 인간의 모습이 더 싫어서 죄를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죄를 안 짓고 교만해지기보다는 짓고 겸손해지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정말 겸손하다면 죄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는 존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란 죄를 짓고 안 짓고가 아니라, 얼마나 겸손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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