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금요일 - 두렵지 않으려면!
저는 어렸을 때 꿈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슈퍼맨처럼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정말 꿈을 꾸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꿈만 꾸었습니다. 그러나 잘 날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날다가 건물에 부딪히거나 땅에 고꾸라졌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을 즐기며 밑을 내려다보며 자유롭게 날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함께 증가하는 것은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 날지도 못할 것임을 알았고 두려움을 이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는 것도 두려웠고 실패하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저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이 찾아와 통곡하면서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스승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셔야 하다니요.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꼭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서의 이 당당함은 선한 영혼은 죽어서도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것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특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에 겁도 없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용기에 신기해합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미움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내 집 드나들듯이 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이끌어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합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 노는 꼬마를 만났습니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이거든요.”
우리 인생의 관리인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 분 소관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서 나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분이 어떤 일로 자신에게 벌을 줄 지 몰라 항상 불안해합니다.
특히 아버지께 신임을 잃었기에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못견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신임을 얻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가장 강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그 분과 멀어지게 되고 그러면 홀로 길가에 버려진 아이처럼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그런 두려움에 떠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선택해야합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하며 살 것인지, 그 분을 뜻을 따르며 당당하게 살 것인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