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여정" - 3.1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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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0-03-19 | 조회수526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3.19 금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사무7,4-5ㄴ.12-14ㄱ.16 로마4,13.16-18.22 마태1,16.18-21.24ㄱ
"믿음의 여정"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자랑스러운 주보성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항구했던 믿음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께로 가는 믿음의 여정 중의 삶입니다.
새벽 독서 중 요셉 성인에 대한 두 대목이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반드시 계셔야 할 분이지만 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사셨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참 겸손하기가 하느님을 닮은 매력적인 믿음의 사람 요셉 성인입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도 생각이 납니다.
‘커져서 텅 빈 空이 되고 작아져 자취 없는 無가 되어 살 수는 없을까 물러나 하늘 背景이 되고 내려와 땅 마당이 되어 살 수는 없을까’
바로 이런 하느님을 닮아 평생 텅 빈 공이 되고 자취 없는 무가 되어, 하늘 배경, 땅 마당이 되어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셨던 요셉성인이셨습니다.
새벽성무일도 히브리서 독서 시 믿음에 대한 다음 구절도 좋아서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한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 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우리들입니다.
이 하느님을 향해 믿음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이 믿음의 여정을 끝내고 하느님께 돌아 간 무수한 믿음의 성인성녀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혼자 단독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하십니다.
끊임없이 당신의 사람들을 찾고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찾는 이들에게만 계시 됩니다. 간절히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은총의 깨달음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진정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조상입니다. 늘 하느님의 뜻을 찾아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느님의 뜻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셉을 통해서도 확연히 이런 믿음의 특성이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에 요셉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고 마침내 주님의 천사의 응답을 받습니다.
시련과 고통 중에 성숙,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온실 속의 믿음은 없습니다. 산전수전 시련과 고통의 여정 중에 정화되고 성숙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믿음이 아닙니다. 봄, 여름, 가을을 통과하며 익어가는 열매들처럼 믿음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수 십 년간, 아니 수 백 년을 더위와 추위, 온갖 비바람과 폭풍우를 견뎌내며 거목의 나무가 되듯 믿음의 성장도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스승과도 같은 큰 나무들입니다. 며칠, 몇 년 안에 이렇게 큰 나무가 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믿음도 그러합니다.
요행이나 비약이나 도약이 없는 믿음의 성숙이요 성장입니다. 이래서 항구히 기다리고 견뎌내는 인내의 믿음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믿음을, 항구한 인내의 믿음을 보십니다. 분도 수도승들의 정주 서원 역시 항구한 인내와 믿음의 표현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끝까지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믿음이 여정에 충실했던 아브라함을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평생 동안 믿음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여정 중에 믿음의 큰 나무들 되어 사신 성인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기까지의 요셉의 내적시련과 갈등은 얼마나 컸겠는 지요.
그러나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순종의 믿음으로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임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동반자가 된 요셉입니다.
평생 동안 계속된 시련과 고통 중에도 믿음의 여정에 충실했던 성 요셉 그대로 아브라함을 닮았습니다.
시련과 고통 중에 성숙, 성장하는 믿음이요, 믿음이 좋을 때 세상 파도나 세월의 풍화작용의 시련에 손상됨이 없이 늘 빛나는 영혼의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믿음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혼자의 믿음은 없습니다. 있다면 환상이요 착각일 뿐입니다. 공동체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 혼자 믿음의 생활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교회공동체의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혼자만의 믿음은 허약하기 짝이 없어 곧 시들어 버리지만 교회공동체에 뿌리 내린 믿음의 사람들 아무도 다치지 못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여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라 명령하시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이후 평생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의 수호자가 되어 함께의 믿음에 항구했던 성 요셉이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얼마 전 어느 수녀님과의 면담 고백 성사 시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든 죄가 공동체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들이군요. 혼자 살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 도전과 응전이 사라져 곧 활력을 잃고 무기력해져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여 죄들이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죄를 짓고 용서 받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죄 안 짓고 혼자 사는 것보다는 죄 짓더라도 함께 사는 것이 영육의 건강에 훨씬 좋습니다.”
함께 사는 믿음입니다. 함께할 때 죄도 짓고 용서도 받고 하며 깊어지고 튼튼해지는 믿음입니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혼자 믿음은 약하기 짝이 없어 얼마 못가 시들어 죽습니다.
진정 마음의 부자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향해 믿음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믿음입니다. 시련과 고통 중에 성숙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함께 사는 믿음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요셉의 믿음이 그러했습니다. 1독서에서 나탄에 내린 주님의 말씀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 요셉을 통해 구세주 탄생으로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언젠가 우리 모두 거목(巨木)의 믿음 나무들이 되게 해주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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