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결국 죽어야 되고
그런 까닭에 현대문명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파멸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전인류적인 종말로 치닫을 수도 있기에
더 큰 위험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그 중의 하나가
디오니소스의 불건전한 부활이다.
이른바 산업혁명 이후
근 이백년간 급속도로 냉각되어지기 만한 까닭에
디오니소스가 철저히도 목졸려 죽은,
그리하여 인간의 엄연한 한 면이요
어떤 의미에선 인간의 참다운 면이기도 한 ’카니벌리즘’이
비정상적으로 억제되어 건강하게 발산될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 결국은 불건전한 곳으로 그것을 쫓아내게 만들었다.
젊은이들의 록앤롤적 광기,
잔혹해지기만 하는 전쟁!
그것은 차가운 광기,
타락하고 병든 디오니소스,
펜테우스의 머리를 들고 다니는 아가우에
그 박코스의 여인들의 광기이다.
그로데스크한 것을 즐기는 대중심리가
’당연히 인정받으며’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이 중세 때처럼
단순한 우화적인 분위기를 넘어섰기에 더 큰 문제이다.
이 모든 게 축제를 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주의적인 서양 기술문명의 죄악 중의 하나는
그들 자신들을 포함하여
전세계 지역의 민중문화
곧 전통문화라 일컫는 지역문화를
철저히 파괴시킨 것이다.
나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오지의 주민들조차 모두가 일률적으로
청바지를 비롯한 서양식 의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온 세계가 똑같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 황제들이나 징기스칸조차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질문화는 존중하여 그냥 나 두었었다.
한데 서양기술문명은 침투하는 곳마다
지역적 고유특성을 철저히 파괴시켜 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 지역의 고유한 축제의 원형적 주체였던
전통적인 조상신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이야말로 축제의 혼을 말살시키는 짓이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카니벌리즘’적인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신명나게 놀 수 있는 축제를 잃은 인간들은
자연 실향민과 같이 병들게 되었다.
그래 그에 대신한답시고
제국주의자들이 "전인류적! 전세계적!"하고
강요하듯 세계화를 떠들지라도
이미 실향의 그들에게 그것은 생소하기만 하고
도체 잘 체득되지도 실감할 수도 없는 이질적인 것이니,
자연 만족감을 얻지 못한 그들은
차라리 불건전한 곳으로 스며들어
’악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말하는 것은
서양에서 나온 기술문명이지,
서양사회나 서양문화가 아니다.
사실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이
4백년 전 탐험시대에
종교적인 전파를 행할 때 만해도 그렇진 않았었다.
즉 그리스도교는 토착화라 할 수 있는
지역적인 적응을 잘 해 나갔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가는 곳마다
축제적 흥분과 열기를 더욱 심어 주었다.
하기야 탐험시대를 연 나라들인 그들
스페인을 비롯한 남부유럽은 원래가 그 자신
따스한 축제의 나라들이었다.
한데 산업혁명 이후부터
인간은 ’우울한 동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아마 근대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전세계를 패권적으로 장악해간 나라가
하필이면 영미를 위시로 한
서늘한 기질의 북부 유럽 국가들이였기 때문일까!
결국 우리는 이 인류문명에 따스한 피를 통하게 만드는
문화의 인간화 작업을 펼쳐야 한다.
특히 문화의 혼인 종교에 따스함을 되살려야 한다.
거기에 ’카니벌리즘’의 회복은 시급하기만 일이다.
교회는 탄탄한 조직을 훌쩍 넘어설 수 있을만큼
그야말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루가 6,38)"
곳곳에 공동체적 우애와 친교에서 나오는
생명력이 가득 차도록 되어야 한다.
특히 각 본당은 지역문화에 활짝 열려 있는
활력있는 문화공간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교회가
’춤추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전례(典禮) 안에서 온전히 부활시킬 때
인류에게 명실상부한 ’구원의 빛’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