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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플만큼 아파야 한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9 조회수596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2:1-11)


 영국의 평론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아내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으나 아내가 죽자 뜻밖에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면서 말했다.
“아, 아내를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말했다.
“가까운 이웃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죄는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한 것이다.
무관심은 가장 비 인간적인 것이다.”
 
 우리는 칼라일처럼 가까운 사람에게조차도 무관심할 때가 많다. 그리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간다. 사랑은 없이 메마른 삶을 살고 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한다.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 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 주간은 성지 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 주간 동안 유다는 요한 복음에 매일 등장한다.
요한 복음 저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유다를 심판하고 경멸하면서 아무 희망이 없고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반면에 마리아와 라자로는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는 유다가 한 일만 기록하고 있고 그를 판단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오 7:1)
우리는 어떤 사건을 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피상적인 것만 보았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들의 판단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사실만 있고 진실은 없다고 말한다.
보나 수사님의 글은 우리들이 자주 범하는 우(愚)를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어떤 무게에 짓눌려 넘어진다. 그것이 나의 죄의 무게일 수도 있고, 주변 상황이 주는 무게일 수도 있으나, 넘어진 사람은 누구나 다시 일어나려고 하는 본능이 발동한다. 이때 문제는 내가 일어나려고 해서 일어나느냐, 아니면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셔서 일어나느냐 이다. 자신이 일어나려고 용을 써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렇게 해서 일어나면 또 넘어진다.
   하느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셔서 일어나야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시는 하느님께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쓰러져 있는 소나무처럼 넘어진 그 자리에 그저 시체처럼 절망 속에 누어있는 것이다. 그저 누어있기만 하면 서서히 어떤 존재를 느끼게 된다. 이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하느님을 기다릴 줄을 모른다. 시체처럼 절망의 침대 위에 누어 있다가 하느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결정적으로 일어섰다고 하는 것이지, 하느님 없이 내 힘으로 일어선 것을 일어섰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일어남은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시려고 하는데도, 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미리 일어서버린 경우다. 산 통 다 깼다. 이러한 경우는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고, 언젠가는 또 넘어진다.
 
광야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유혹들을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 하느님으로 물리쳤다. 자신이 물리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철저히 가난하신 현장이다. 이를 간파한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의지를 철저히 배격한다. 이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하느님을 모신다. 이보다 더 시원하고 기쁜 일이 일생일대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일로부터 은근히 모면하려고 하고, 실패에서 재기하려고 하고, 다시 성공하려고 하고, 다시 명예를 쥐려고 하며,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한다. 아니다. 여기엔 하느님이 없고 나만이 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께 한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안락과 재물과 명예로 유혹한다. 세속적인 재기에 성공하여 일어났다고 해도, 하느님을 모시고 일어나야 참다운 성공이라 할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 그립지 않은가!
 
아플만큼 아파야 한다는 말이다. 아플만큼 아파야 성숙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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