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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02 조회수409 추천수7 반대(0) 신고

 


성삼일 첫날이다.

예수님이 게세마니 동산에서 군사들에게 잡히시고 밤새도록 고문과 채찍질을 당하

신 후

내일이면 낮 12시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 세시쯤이면 큰 소리를 지르며 돌

아가신 사건을 기념하는 중요한 기간이다.

그 첫날 밤, 바로 오늘 밤,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어

주셨다.

성서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예수님의 심중을 이렇게 헤아리고 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뭘 아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만 끝나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다를 것이 별로

없다.

 

그런 사실을 잘 아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실천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었다.

예수님의 사람, 그분을 믿는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이 무엇

인지

몸소 가르쳐주고 본을 보여주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그런데)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

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그전에 베드로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

다.”

 

선행을 베푼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제공받는 사람이 선행 그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더 받게 하려고 발을 씻는

 것이니 가만 있으라는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숙제가 있다고 하면,

우리가 그 숙제를 하는 것은 그 숙제를 함으로써 숙제에서 오는 부담감에서 해방되

는 것이 목적이고

그것은 결국 숙제를 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는 말

씀의 뜻이 어떤 정도인지 밝혀주는 말씀인 것 같다.

남을 섬기는 목적이 자칫하면 내 선행과 공덕을 쌓는 것으로 목적을 두기 쉬운데,

끝까지 철저하게 섬기는 대상을 목적으로 해야 함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내가 너에게 잘해 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잘해 다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루카 6,32-34)

 

최후만찬의 의미는 이렇게 해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받아 먹어라.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너희를 위하여 흘

릴 내 피다”

 

끝까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제자들과

또 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당신을 따르게 될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서

당신 피까지 송두리째 바치는 것이 최후만찬의 의미였다.

 

그렇게 우리도 서로 남에게 내어주는 삶을 살라고 그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제

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또 똑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당시 제자들은 잘 몰랐다고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 뜻을 알려주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설명해 주었어도 베드로는 그 뜻을 잘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배신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회개의 눈물을 쏟았지만 그 때까지도 충분히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너희도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나중에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순교할 때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뭔가 안다는 것은 참 좋고 유익한 것이지만

아는 것으로만 끝나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모르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

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도 하라고 … 본을 보여준 것이다.”

그대로 본 받으라는 지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본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

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것은 철저하게 남김없이 당신 자신을 비우는 것이었다.

 

구약의 첫 번째 파스카도 사실은 그런 것이었다.

에집트 백성은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살리는 것이 첫 번째 파스카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에집트 백성을 죽인 것은 그들이 짐승처럼 종으로 부려먹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래서 에집트 사람들을 원수처럼 여기고 복수를 다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

라,

하느님이셨단 사실이다.

십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분이 살인을 하신 것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런 것이 하느님의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살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죽이는 분이라면,

도데체 어떻게 해야 그분 마음에 들 수 있고 또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요나 예언서에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던 분이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

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

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

느냐?’”(요나 4,9-11)

 

그렇다면 에집트인들에게도 똑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에집트에도 왼쪽 오른쪽도 가릴 줄 모르는 아이들이 수십만 명이나 있고

수많은 짐승이 있는데 그들도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그런데 하느님은 그 아까운 에집트 사람들의 귀하디 귀한 맏자식들을 죽이셨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첫 번째 파스카 제사에서도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

이렇게 이미 벌써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의 새 역사를 시작

하는 십자가의 제사를

이미 첫 번째 파스카에서 치루셨다.

 

이것이 파스카의 의미다.

파스카라는 죽음을 건너 부활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옮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람의

 희생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희생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파스카 제사에 동참하기 위해,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같은 몫을 나누어받기 위

우리에게 하신 명령이 발을 씻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희생되는 내가 아닌, 내가 희생됨으로써 구해지는 그 사람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까지만 희생해주고 그 다음부턴 희생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듯이 말씀하셨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

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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