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84)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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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순의 | 작성일2010-04-30 | 조회수38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0년4월30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성 비오 5세 교황 기념) -사도행전13,26-33;요한14,1-6-
(484)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시다!
이순의
욕심이었을까? 사순시기에 지향으로 세운 목표 중에 하나인 십자가의 길 묵상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거뜬히 완성을 했을텐데, 어려웠다. 처음 못 쓰게 된 원인은 섬 집에를 가는 일이었고, 섬 집에는 컴퓨터가 없다. 그래도 다녀와서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에 써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섬집에서 상경할 때쯤 하여 목이 아파왔다. 찬 갯바람 탓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집에 가면 회복 되리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장거리 여행을 한데다가 1년 동안 비워둔 집을 청소하려니 무리였을까? 그만 몸져 눕고 말았다. 무엇이든지 불가능 하였다. 너무 심하게 아프다 보니 헛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흙에서 살아서 기생충이 내 몸을 휘젔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을에 돌아왔을 때 짝꿍이 구충제를 사다가 온 가족이 함께 먹은 생각도 나고, 너무 고생을 해서 심장이 부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 운전을 하고 섬집에 까지 갔다가 왔으니 심장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고, 아무튼 아파도 단단히 아팠다.
그런데 성주간을 본당에서 보내고 싶어서 서둘러 다녀 온 섬 집이지만 성주간 보다 더 다급한 일이 있었다. 아들 친구 엄마들! 8년째 매월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야만 하는 엄마들께서 봄이면 산으로 가버리는 나 때문에 날을 잡았다. 1박으로 다녀 오는 제주도 여행! 날 좋을 때도 많은데 하필 1년 중에서 가장 황량한 겨울의 끝대목에서 급하게 날을 잡은 이유가 내가 산으로 가버리고나면 나만 빼고 일곱이서만 여행하고 싶지 않다는 배려였다. 그런데 아파도 너무 아팠다. 나 때문에 그 날을 잡은 여행에 내가 빠지기에는 너무나 미안하다. 바쁠때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마음 써서 잡아 준 여행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나름 방법은 써 보았다. 링거주사도 맞고, 잠만 하루종일도 자 보았고, 약도 열심히 먹어도 보았고, 그리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혹시라도 일행들께 독감이라도 옮을까봐, 몸살이라도 옮을까봐, 그것이 무엇이라도 옮을까봐, 계속 마스크를 쓰고, 차량의 맨 뒷자리에 앉아 배려에 대하여 조심은 하였지만, 와~! 진짜 비 많이 오데! 이틀간 비가 비가 얼마나 오시든지! 그래도 생애 두번째 간 제주도 여행길에 많은 변화를 느꼈었다. 제주도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팠지만 내 스스로 가보기 어려운 곳이었으니, 엄마들께 감사하는 마음이야 그지 없었고, 많이 행복했다. 비는 오셨지만 남쪽 끝이었으므로 꽃이 만발하였었다. 유채꽃도 한창이었고!
그리고 돌아와 완전히 깔아져 누워버리고야 말았다. 겨우 부활 대축일 자정미사마저도 겨우 다녀 온! 정말이지 수술이 아닌데 이렇게 오랫동안 지독하게 아파보기도 처음이었다. 며칠 앓거나 병원가서 약 받아오면 그 약을 다 복용하기 전에 거뜬해지곤 하였는데....... 평소 지니고 살던 가벼운 증상들도 못 느낄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런 나에게 짝꿍도 걱정이 되었던지 <자네 늙는가 보네.> 라고 한다. 이래저래 컴퓨터를 열어보더라도 눈요기만 할 뿐, 손가락 하나의 매듭도 꼼지락 거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제9처! 주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신 대목에서 나는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KO패를 하고야 말은 것이다. 사실 십자가의 길 묵상글을 시작하면서 나와 다른 타인이 아니라 타인과 같은 나를 발견해 가고 싶었다. 너와 나는 다르다가 아니라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더라는 이야기! 그러므로 나도 별거 아니니 너도 별거 아닌 그런 마음으로 겸손을 찾아가고 싶었다.
흔히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 중에 <나는 그렇지 않아.> 와 <그러면 나는 못 살지.> 같은, 내가 남과 같지 않다는 말들을 무심결에라도 참 많이 하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세번씩이나 넘어져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고뇌가 아무리 고품격이라 자만하더라도 죄 중의 죄이고, 인간의 일상이 아무리 비싸다고 자랑할지라도 썩어 없어질 육신의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네 사람들은 진짜로 자기가 타인과 격이 다른 줄 알고 착각하며 산다. 그래서 쉽게 <나는 너와 구별된다> 라는 <다르다> 라는 값없는 가치를 두르며 자만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사람이라는 심성이 그 값없는 하찮은 격식에 중독되어 사는지도 모른다. 그 중독의 결과로 자기 오만에 빠지는! 그런데 가축의 우리! 구유에 누우신 탄생에서부터 처절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길을 걸으시는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격이라는 것! 급이라는 것! 레벨이라는 것! 수준이라는 것!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내 스스로에게 <너와 나는 같다> 라는 발견을 해주고 싶었고, 너에게도 <너와 나는 같다> 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같다> 라고 생각을 하면 크게 마음 아플 일도 아닌 것을 너와 나는 다르다고 우기는 그 어리섞은 인간성 때문에 참으로 죄 많이 지으며 산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젊은 날에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인생은 끊임없이 가르치는 교과서이고, 그 배움 앞에서 참 많이도 부끄러워진다. 내가 좀더 젊고 어릴적에 이 공부를 했더라면 또 어떠했을까? 를 생각하기도 해 보고, 내가 이런 공부를 해 보지 않고 죽는다면 나이 많은 늙은이 부터 돌아서 갔던 주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끝까지 돌을 던지는 악동이었을지? 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래도 아플지라도, 슬플지라도, 고통일지라도, 남이 하는 공부는 다 해보아야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내 삶의 지팡이이신 아버지께서 숙제를 풀라하시지 않았을까? 성찰해 본다. 그 원하시는 해답을 풀기 위해서 지난 겨울을 다 사용했었다. 그냥 행복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행복이라는 해답! 그냥 객관적 행복이 아니라 주관적 행복을 주님께 응답할 수 있는 행복! 그냥 그런걸거야 라고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이런거야 라고 정의할 수 있는 행복!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 다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님 마음에 들게 답할 수 있는 정답을 얻으려 나름 노력한 겨울이었다.
그 해답을 답안지에 쓰지도 못했는데.......
아파버렸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고개 빳빳히 들고 정답을 외치는 악동은 싫으셨나보다. 차라리 넘어져 누워 머리골 어지러운 상태로 달걀을 그리고, 다시 그대로 누워 한참을 앓기를 원하셨나보다. 제9처 주님께서 세 번이나 넘어지셨듯이!
오늘의 미사 강론은 나에게 커다란 행복을 주었다. 산으로 가기로 한 날이 자꾸 뒷걸음질를 친다. 추위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산만하다. 여장을 쌌다가 풀었다가, 여간 불편한 상황을 보내고 있다. 그런 중에 오늘 강론이 참 행복이었다. 요약하여 정리해 본다면!
<4월의 마지막 날!
4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뭔가 가슴이???
생각하여 보니 4월은 잔인한 달!
목련꽃잎 떨어진 모습을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새로운 봄을 잘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씼겨줬던 날로 시작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만찬상의 모습만 간단히 기록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만찬상의 주님의 말씀들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파견한 자!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한 그 모습!
<나를 통해 아버지를 보듯이 너희를 보면서 나와 아버지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로 사는 것이 나와 아버지를 보는 삶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평상시에는 저도 이 말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께서 오셨을 때 주님의 이 말씀을 제자들은 다시 되새기면서 깨우치게 됩니다. 나를 통하여 아버지를 보듯이 너희를 통하여 나를 본다는 그 깊이가 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 가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서 너희와 함께 하겠다.> 고 말씀 하실 때도 보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던 토마스가 또 질문을 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음 삼덕! 믿음, 희망, 사랑의 길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 살아 오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 중에 육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끼리 소유하려 하는가?! 가족들의 마음을 소유하기 보다 육신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지만 진정 당신이 걸으신 길은 인간의 길! 인간이 되셨고! 인간으로 사고 하셨고! 인간으로 눈물을 흐르고, 고통을 당하시고, 희망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드는 길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중략-
우리가 다함께 할 수 있는 아버지의 집을 이 4월이 끝나는 날에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이 허물어지고, 육신이 허물어지는 날에, 예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새로운 거처에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 강론이 제게 참 행복을 주었습니다.
어제는 천안함 장병들의 장례식이 있었고, 조문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장례절차는 국법이 허용하는 최대의 절차를 수용한 것 같지만, 국민의 가슴은 4월의 잔인함을 가슴에 새기는 그런 날이기도 했지요. 그렇게 희고 고운, 맑고 순결한 목련꽃도 짖이겨진 갈색으로 떨어져 땅에 뒹구는 모습을 볼 적에는 4월이 잔인한 달이 분명합니다. 어데 목련화 뿐이겠습니까?! 그런데요.
강론의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제로 살아 오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 중에 육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끼리 소유하려 하는가?! 가족들의 마음을 소유하기 보다 육신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셨지만 진정 당신이 걸으신 길은 인간의 길! 인간이 되셨고! 인간으로 사고 하셨고! 인간으로 눈물을 흐르고, 고통을 당하시고, 희망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드는 길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대목이 그렇게도 제 마음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였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붙들고....... 생각만 해도 아찔한! 주님께서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시라서 제 마음까지도 다 알아 주신다는 확신! 그 결과로 나도 아버지의 집에 들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눈에 보이시는 분이셨다면 저부터 주님을 찾아가 얼마나 얼마나 귀찮을 만큼 괴롭게 하였을 것이고! 또한 힘센 사람들은 힘이 센대로 저를 주님 곁에 머물게 하겠는지요?! 살아오면서 밀려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 것이 인생이던가요?! 그러니 잔인한 4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로이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하며, 주님처럼 사랑하겠습니다. 그리고 넘어졌던 무릎을 털고 일어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그런데요. 미사 후에 만남의 방에서 좀처럼 나지 않는 용기를 내어 <신부님 오늘 강론으로 행복했습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는데요. 신부님께서 답례를 해 주셨거든요. 문제는 신부님께서 등을 돌리고 서서 답을 해 주신터라서 무슨 말씀을 해 주셨는지 제가 모릅니다. 아까워도 어찌합니까?! 제 귀가 들을 귀가 아닌 걸요. 제가 고해실에서 성사를 볼 적에도 제 말만 다 하고 혹시 훈화 말씀이나 사죄경이나 보속을 못 알아 들을까 봐서 얼굴을 돌리고 귀를 찰떡보다 더 단단히, 껌보다 더 단단히, 붙이고 듣습니다. 고해소에는 마이크도 없고, 신부님의 입술도 안보이거덩이요. 어휴~! 신부님 오늘 뭐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듣고 싶어요.
아~! 아깝다.
앞으로는 등돌리고 서서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자꾸 아까운 생각이 들잖아요. 뭐라고 하셨는지요?
-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 하였겠느냐? 요한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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