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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토피아 공동체" - 5.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02 조회수346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5.2 부활 제5주일

사도14,21ㄴ-27 요한 묵21,1-5ㄴ 요한13,31-33ㄱ.34-35

 

 

 

 

 

"유토피아 공동체"

 

 

 

저희 수도원 닭장에는 스물다섯 마리의 닭이 있고,

배 밭에는 약 천 그루 이상의 배나무들이 있습니다.

각각 마치 하나의 큰 공동체를 이룬 듯합니다.

닭들의 공동체, 배나무들의 공동체입니다.

아, 그러나 닭들은 이름도 없고 똑같은 모습에 똑같은 크기에

구별하기가 참 힘듭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모이를 주면 모두 달려옵니다.

배나무들 역시 이름이 없고 비슷비슷하여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닭들 사이나 배나무들 사이는 관계 맺음이 없습니다.

다들 무관하게 의식 없이 혼자 살아갑니다.

 

 

바로 이게 사람 공동체와의 차이입니다.

사람만이 각각 고유의 이름이 있고 관계 맺음이 있습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애당초 공동체의 관계를 떠나선 존재할 수도 살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관계의 다양성과 깊이와 더불어

자기발견에 자기실현이요 충만한 존재의 삶입니다.

함께의 공동체를 이루되 획일화 할 수 없는

다 이름을 가진 고유한 존재들이요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문득 떠오른 다음 성경 말씀들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배려와 보살핌을 받고 있는

귀한 존재들임을 천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배려와 보살핌은

사람 하나하나마다 수호천사를 두셨다는 사실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 하나하나를 알고 챙기시는

착한 목자 주님에 대한 다음 묘사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사람만이 지닌 그 고유의 이름이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기쁨으로 활짝 피어나던 형제자매들의 환한 얼굴들 잊지 못합니다.

 

그대로 구원의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름 없으면 관계도 못합니다.

부르라 있는 이름이며 관계하라 있는 이름이니

기회 있을 때 마다 다정하게 그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이름 하나만 잘 불러도 좋은 관계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바로 그만의 이름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그 고유한 이름을 지닌 이들이 관계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해서 사람이요 기도해서 공동체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으로 살기위해 기도요 공동체 형성을 위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내 삶의 중심, 공동체의 중심이신 하느님이 분명해집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선적인 게 하느님과의 관계요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기도하지 않아 냉담하면

하느님도 잊어버리고 영혼 역시 거칠어지고 황폐화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는데

기도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도 얼마 못가 고갈됩니다.

 

기도는 마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의 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자들을 위해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을 주님께 의탁하고,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돌아 온 후

보고 역시 하느님께 모든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끊임없는 기도에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셨던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

너와 나와의 관계도 깊어져

요한 묵시록의 유토피아 공동체도 실현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유토피아 공동체를 앞당겨 살게 하는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 공동미사를 통해 환히 계시되는 유토피아 공동체요,

이 미사은총이

우리 공동체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하느님을 생생히 깨닫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사랑해서 공동체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이며 우리의 모두입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민의 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약하면서도 강하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게 사랑입니다.

거짓 사랑도 많아 참 사랑을 식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참 사랑을 식별하는 기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더불어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 한 가운데에 사랑의 샘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참 사랑을 식별하는 잣대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때 참 사랑, 깨끗한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으로 부단히 업그레이드되어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불순, 편협한 사랑입니다.

이래서 평생 배우고 공부하고 체험해야 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은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사랑 실천에 항구하게 합니다.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이웃 형제를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은총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저절로 이웃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과의 깊어가는 사랑의 관계가

이웃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게 합니다.

사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수도승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하나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고 받아들이며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수도형제들의 사랑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사랑 역시

그대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언제나 새 계명입니다.

이런 ‘사랑의 눈’에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실입니다.

이 사랑이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듭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때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사람 역시 이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하는 공동체입니다.

일해서 사람이요 일해서 공동체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일을 통해서도

하느님과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깊이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바로 우리 분도회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 영광을 위해서 하라하십니다.

일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이 목표입니다.

이래야 일중독으로 몸과 마음 망가지는 일 없습니다.

일에 빠져 하느님을, 사람을 잊고 지내는 경우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일,

이웃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일일 때 축복된 일입니다.

아무리 일이 좋아도 하느님을, 사람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었다.”

 

십자가 죽음의 큰일을 통해 자신도 영광스럽게 되고

아버지도 영광스럽게 되셨음을 선언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항구한 사랑의 일이,

제 소임에 충실한 일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두 사도의 말씀이 참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으로 많은 노고의 환난을 겪어낼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항구할 때,

사랑에 항구할 때,

일에 항구할 때 비로소 자유롭고 행복한 유토피아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과 관계, 이웃과의 관계도 깊어지면서

내 이름이 상징하는 고유한 참 나를 살게 되니

바로 이게 묵시록의 유토피아공동체입니다.

 

“하느님 친히 우리들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유토피아공동체를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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