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해와 편견에도 생명력이 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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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요하 | 작성일2010-05-10 | 조회수392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 (18) 오해와 편견에도 생명력이 있답니다 청년 시절부터 ‘4’라는 수를 유난히 좋아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4, 또는 40을 결부시키는 버릇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내가 4, 또는 40이라는 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 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답니다. 성경 속에는 40이라는 수가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은데, 내 탐구심과 신앙심이 발전하면서 4와 40이라는 수에 애착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는 지금도 4라는 수와 각별한 인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호수가 804호인데, 4가 있을 뿐만 아니라 4의 곱인 8도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태 전 태안 ‘기름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병상 생활을 한 기간이 44일이었습니다. 퇴원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가 젊은 시절부터 유난히 4와 40이라는 수를 아끼고 좋아하며 살아온 공으로 하느님께서 40에다가 4를 얹어서 4가 두 개 겹치는 44일을 병상생활로 주셨다.’ 이렇게 생각하니 절로 즐거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4라는 수 때문에 남에게 미안한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친지가 아파트를 계약했는데 4가 들어가는 호수여서 계약을 취소하고 다른 집으로 바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말을 했지요. “앞으로 팔을 하나 떼고 살아. 그렇게 4가 싫은데 사지를 왜 달고 사냐. 앞으로는 자동차도 타지를 마. 바퀴가 네 개잖아. 밥도 밥상에서 먹지 말고 방바닥에서 먹거나 들고 서서 먹어. 또 혹 야구장에 가거든 4번 타자는 보지도 말아. 그리고 웬만하면 4계절이 없는 아프리카나 알래스카 같은 데 가서 살아. 또 있어, 동서남북 4방향 중에서 한쪽은 절대 보지 말고 살아.” 그러자 그 친구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피식 웃고 말더군요. 4는 오로지 넉 사(四)일뿐 죽을 사(死)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건만 ‘음’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 세상에도 의외로 4라는 수를 재수 없는 수로 여기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상한 무지 현상 때문에 내가 일종의 반발심으로 4라는 수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0년 5월 9일(부활 제6주일)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주보> 제2029호 | 5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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