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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주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3,602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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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에 올려진 자료입니다. 현재 번역작업이 진행중인 전례학 사전 해당 항목의 초안입니다.

 

 

례주년 (이) anno liturgico (영) liturgical year

 

 

I. 전례주년에 대한 문제점 - II. 점진적인 발전 - III. 성서적-신학적 기초: 1. 구세사에 기초한 전례주년, 2. 하느님의 모든 계획: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 종말론적 차원, 3. 파스카 신비로 바라본 그리스도의 신비들, 4. 역사적 사건에서 전례적 기념으로 - IV. 전례주년을 지키는 까닭 - V.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주년 개혁 - VI. 전례주년의 영성 - VII. 전례주년을 통한 사목

 

 

I. 전례주년에 대한 문제점

 

전례주년을 다룸에 있어 →세속화에 의해서, 기술-산업화된 사회에 의해 조건 지워진 현재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현재의 환경은 전례주년이 태어나고 발전된 시대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종교적 축제’ 자체를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종교 세계(→거룩함)의 찌꺼기로 보면서, 하느님과 만나는 진실한 자리가 ‘일상적’이며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세속적 신앙’만을 정당시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사목자들은 세속적 극단주의나 이전 시대의 종교적 완전주의에로 숨어들 수는 없고 오히려 더욱더 순수하고 진실한 신앙의 태도와 내용을 재발견하고 정화하기 위하여, 현재까지 일어났고 또 발전과정 중에 있는 문화적 전이(轉移)를 고려하여야만 한다.

 

전례주년의 구조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창작품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교회 신앙의 정수인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루고 있다. 성서의 용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교리교육과 현대인의 용어를 고려하게 만들어주는 교육을 전제로 하고 전례주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신빙성 있게 제시한다면, 또한 사람과 함축적으로 연계시켜 전례주년을 거행한다면, (전례주년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세계로 도피하게끔 만들지 않고 오히려 신도들로 하여금 역사의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당신의 외아들을 주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요한 3,16) 분을 만나 뵙도록 끊임없이 도울 것이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전례는 - 전례행위와 함께 - 해방된 존재를 재고 박자를 맞춰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례의 시간은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은총의 ‘현재’(은총이 내리는 현재)라는 시간이다(즉 전례를 드릴 때 은총이 내린다). 전례주년에 의해 생명을 얻고 거행되어지는 구세사,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구체화되고 고정되는 구세사에 대한 모든 중요성을 인지하기 위하여 ‘은총의 현재’를 숙고한다는 것은, 진실로 영원한 성서신학의 노선들을 찾아나간다는 것을 뜻한다”.

 

 

II. 점진적인 발전

 

전례주년은 하나의 ‘이상’(理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자 시간 안에 현재화되는 그의 신비이며, 오늘날 교회가 ‘기념’, ‘현재’, ‘예언’으로서 성사적으로 거행하는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례를 통하여 이해하고 전례로 드러내왔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비의) 핵심적인 요소의 거행에서 점차 (신비를 여러 측면에서) 나누어 기념하게 되었다. 즉 파스카 신비를 여러 개개의 신비로 구체화시켜 거행한 것이다.

 

교회 역사 초기에는 파스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례, 선포의 유일한 대상이었다.(→ 성삼일)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교회의 예배란 파스카에 의해 태어났고 파스카를 거행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교회시대에는 ‘신비들’을 지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지냈다. 그리스도교 전례 초기에 →주일은 유일한 축일이었으며, ‘주의 날’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거의 동시대에, 아마도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영향을 받아 파스카를 일년에 한번 성대하게 지내는 ‘대주일(大主日)’이 나타나게 되었고, 후에 이 축일은 (파스카를 삼일에 걸쳐 지내는) 부활삼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에는 파스카를 50일간 지내게 되었다. 이어 4세기에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수난 장면들을 묵상하고 생생하게 느끼기 위해서 (예수 수난의 장면을 실제 일어난 대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역사화(歷史化)가 일어났으며, 이는 성주간 형성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다. 파스카 전야에 이루어지는 세례와(이미 3세기 초부터 행해졌다), 참회 규칙과 더불어 성목요일 아침에 이루어지는 화해예식(5세기)은 성서에 나오는 ‘40일’에 영향을 받아 파스카를 준비하는 기간이 탄생했으니, 이는 바로 →사순시기이다(사순시기란 40일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성탄시기(→성탄/공현)는 파스카 신비의 통합적 관점과는 독립적으로 4세기에 태어났다. (성탄시기가 나오게 된 까닭은) 신도들로 하여금 동지에 지내는 이교도의 축제인 ‘무적의 태양’ 축제로부터 멀리 띄어놓기 위해서였다. 4-5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치열한 신학적 논쟁은 성탄 축일에서 육화신비에 대한 진정한 신앙을 확정하기 위한 기회를 찾게 되었다. 4세기 말에는 파스카시기에 맞추기 위해서 4주 또는 6주간의 (성탄축일의) 준비기간을 설정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대림시기’이다.

 

순교자 공경은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서(→성인) →파스카 신비에 대한 통합적 관점과 연계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때문에 피를 흘린 이들 순교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성부께 대한 자신의 증언을 최대한 한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마리아 공경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 순교자 공경보다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에페소 공의회(431) 이후에 마리아 공경이 발전되었으며, 동방과 서방을 막론하고 성탄시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더욱 공경되었다(6세기).

 

짧게 역사를 흩어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즉 전례주년은 조직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삶에 바탕을 두고 발전되고 성장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내적 풍부함과 다양한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른 사목적 필요성에 연계되었던 것이다. 전례주년 거행의 통합적 요소를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탐색은 이미 발전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행해졌던 것이다.

 

 

III. 성서적-신학적 기초

 

전례주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적-신학적 기초가 잘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례주년의 여러 요소들 안에서 발견되는 통합적 요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전례주년의 본질적 내용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며 그로 인해 영적, 사목적 차원에서 중대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1. 구세사에 기초한 전례주년 -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점이다. →시간은 영원을 실어 나르는 도구이다. 계시는 구원계획, 즉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하여 “서로 긴밀히 연결된 업적과 말씀”(계시헌장 2)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다. 이 →구세사는 본질적으로 예언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 역사 안에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주는 계약을 실현하고자 (주도권을 쥐시고 당신 스스로 먼저 이루시는) 하느님의 활동들이 모여있다. 성 바울로는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이 구원계획을 →‘신비’라고 불렀다. 전례주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신비를 지낸다. 따라서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 그리고 인간의 삶 안에 들어오신 일련의 사건들에 뿌리내리고 있다.

 

2. 하느님의 모든 계획: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 종말론적 차원 - 구세사의 기초가 되고 그 구세사를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자 마침으로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참조. 에페 1,4-5; 골로 1,16ㄴ-17). 이 구세사에서 그리스도는 중심이며, 모든 것은 이로부터 빛을 받고, 모든 것이 이를 중심으로 모인다. 창조로부터 종말의 그의 영광스러운 등장에 이르기까지의 하느님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피조물은 그 시초부터 그에게로 향하고 있으며, 자신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시간 속의 여행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까지 나아간다. 생명의 중심이자 모든 것을 비추는 것은 파스카 사건, 즉 부활하신 이의 파스카 주권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아가페이다(참조. 1고린 15,20-28).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조직적-점진적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조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 하신) 구원약속과 아브라함의 부르심까지, 시나이의 계약으로부터 새 계약의 선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육화로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종말의 결정적 순간의 완전한 실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종말론) 이 종말 때 “하느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1고린 15,28ㄴ). 구원계획의 각 단계가 그 뒤에 따를 다음 단계를 준비만 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모양으로라도 (다음 단계에서) 자랄 씨처럼 다음단계를 이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장하는 각 순간은 이미 그 시초부터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성과 전체성 안에서 그리고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역동적 차원 안에서 신비를 보아야 한다.

 

창조는 약속이 아니라 구세사의 첫 행위이다. 구약은 말씀의 육화를 준비하는 역사인 것만은 아니며, 그 자체로 이미 구원계획이다. 비록 이 구원계획이 아직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약 안에서 구약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당신 백성을 세우시면서 구원을 완성시킬 사건을 미리 내보이셨다.

 

예수의 인성 안에서 이미 우리의 구원이 된 그 구원신비들이 완성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시간 역시 그리스도의 시간과 근본적으로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말씀과 성사들을 통하여 완성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교회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된다. 역사 안의 하느님의 계획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이라는 관점은 전례주년의 내적 통합성, 구조, 가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적인 것이자 본질적인 것이다.

 

3. 파스카 신비로 바라본 그리스도의 신비들 - 예수 사건은 그 전체적 맥락 안에서, 파스카 사건을 향한 긴장이라는 구원계획의 차원 안에서, 우리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의 삶 가운데 있었던 사건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 비록 각각의 사건들이 그 나름의 구원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를 향해 나아가는데, 우리는 이들 사건들을 단 하나의 신비 전체 안에서의 구원의 순간들로 보아야 한다.(→파스카 신비) 이 중심 즉 파스카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예수의 인격과 임무를 고려하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서들과 신약의 저서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신학적 관점이다.

 

전례주년은 역사적 관점으로부터 나자렛 예수의 지상생활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 그의 신비 또는 그리스도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구원계획이 완전히 완성되었던 것이다.

 

4. 역사적 사건에서 전례적 →기념으로 - 구원 사건의 역사적 차원을 살펴본 다음 전례주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례적 차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전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효력을 지니고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구약 시대에 구원 사건은 축제의 형태 또는 기념 의식을 통하여 항구하게 기념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각 세대는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고 현재화시키며 그 구원(사건의) 완성이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축제는 출애굽이라는 파스카 사건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구원 사건들을 완성하였으며, 동시에 이 사건들을 기념하는 축제들의 의미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서(의 약속)가 완성되며, 그와 함께 주님의 해가 시작된다. 즉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결정적 구원이 이루어진 ‘오늘’이 (그를 통하여)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찬 (형태의) 의식을 통하여 당신의 파스카를 시간 속으로 집어넣으셨다. 이로써 구원 현실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까지 성찬례를 통하여 인간 역사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구속주(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것이 성사 의식 안으로 들어갔다”(레오 대교황, 〈승천에 대한 제 2 강론〉, 1, 4, PL 54, 397-399). 그러므로 교회 축제의 대상은 죽임을 당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교회 안에서의 전례적 시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구원의 위대한 순간이외 다른 것이 아니며, 모든 전례주년은 구세사를 시간 안에 나타낸 것이다. 점진적-조직적인 구원계획의 전망 안에서, →전례거행은 구원계획의 실현 또는 그리스도 신비의 내면화라는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 시간은 구원을 전달해주는 성사 행위의 ‘질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들을 1년을 단위로 (반복적으로) 지낸다해서, 이것이 영원한 윤회(회귀)라는 이교도의 신화적 개념에 따른 순환적 반복인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위해서, 특히 전례 행위 안에서 실현되는 구세사는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비의 완성을 향해서 열려있고 그리로 올라가는 운동인 것이다. 교회가 매년 그리스도 신비를 여러 측면에서 지내는 것은, (신비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뽑힌 이들과 함께 주의 영광스러운 발현 때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다.

 

 

IV. 전례주년을 지내는 까닭

 

앞에서 우리는 신앙에 대한 세속적 관점으로부터 제기되는 전례주년에 대한 이의제기를 살펴보았다 (→앞, I). 이제 우리는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반대에 대해서 다뤄보기로 한다.

 

성찬례에 교회의 모든 영적 보화,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를 가두게 된 이래, 그리스도의 신비와 구세사의 모든 측면을 성찬례에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만 보려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전례주년의 구조가 필요한지에 대해 묻게 된다. 만일 구원의 실재가 매 성찬례 안에서 온전하고도 전적으로 드러난다면, 무슨 이유로 미사를 매일 지내며, 일년에 걸쳐 축일들을 배치한 까닭은 또 무엇인가?

 

교육적, 신학적 성격의 이유들이 전례주년을 정당시해 준다. 교회가 성령의 감도 아래 하나 뿐인 신비(파스카 신비)가 가지고 있는 여러 면들을 구체화시키는 까닭은, 무한히 풍부한 신비를 단 한번에 관통하고 이해하기란 우리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신비의 여러 측면을 전례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을 우리는 전례 축일이라고 부른다.

 

이밖에도 좁은 뜻의 신학적 이유도 있다. 하느님의 구속업적과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돌리는 일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하지만 파스카 신비만을 통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행위 모두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며, 이 행위 각각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신비들(예수의 행위들)은 최종적 사건으로 넘어가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을 형성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의 사랑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비의 재현인 전례는, 신도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전달하기 위해 이 구원 사건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성찬례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V.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주년 개혁

 

전반적인 전례개혁을 확정하는 가운데 전례헌장은 전례주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례주년을 재검토하여, 거룩한 시계(時季)들의 전래적(傳來的)인 관습과 규정들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혹은 보존하거나 혹은 개정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속죄의 구원 신비 특히 파스카 신비를 거행함에 있어, 신자들의 신심을 충분히 배양하기 위하여, 시계들의 본질은 보존되어야 한다. ...신자들의 마음은 일년을 통하여, 특히 구원의 신비를 거행하는 주의 축일들을 지향하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시계 고유 축일들은 성인들의 축제에 앞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구원 신비의 완전한 주기(週期)가 마땅히 경축되도록 해야 한다”(전례헌장 107-108).

 

이미 성 비오 10세와 요한 23세는 다음과 같이 정한 바 있다. “주일의 원래 품위를 되살리고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주일을 ‘첫째가는 축일’로 여기게끔 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사순시기의 전례를 복구할 것이다.” 비오 12세도 서방 교회 안에서 부활전야 예절을 복구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 입교성사를 복구하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와 맺은 영적 계약을 하느님의 백성이 갱신하도록 하였다. 바울로 6세는 교서 〈파스카 신비〉(Mysterii Paschalis, 1969년 2월 14일)를 내면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을 반포하였는데, 위에 말한 교황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모두 실려 있다.

 

전례개혁은 진실한 전통(으로의 복귀)와 (전례의) 단순화라는 신학적-사목적 기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전례개혁은 중복되는 축일을 피하고 특히 파스카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그리스도 신비의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전례를 더욱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명백하고 질서정연하게 재구성하도록 촉진하였다.

 

이리하여 전례개혁은 다음과 같은 기초를 놓았다: ① 주일은 첫째가는 축일로서, 따라서 신도들의 신심을 일깨워 이 날을 존중하도록 할 것이다(전례헌장 106). ② 파스카 신비와 파스카 신비가 그 중심을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의 거행을 첫자리에 놓아야 한다(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지침 17-18). ③ 성인 축일들 수를 줄여 참으로 보편적인 성인들의 축일만 지낸다(전례헌장 103-104).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한다는 것이니,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더욱 가깝게 닮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성인들) 안에서, 특히 “구속의 가장 탁월한 열매”인 마리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가 실현되었다고 보는 까닭이다(전례헌장 103-104).

 

 

VI. 전례주년의 영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언한대로 전례는 “신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펴낼 첫째요 또한 불가결의 샘이다”(전례헌장 14). 전례주년을 통하여 구속의 신비들을 기념하는 가운데 교회는 신도들에게 주님의 구속행위의 풍요로움을 열어주며, 그러한 신비들을 언제나 현존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신도들이 그 신비들과 접촉하게 만들고 구원의 은총으로 채워지도록 한다(참조. 전례헌장 102). 교회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인정받는 영성이라면 이 같은 일반적 샘(전례)을 만나 그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전례영성).

 

전례주년을 통해서 거행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근본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속적 측면보다는 감상적이고 교화적이며 일화적(逸話的)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소위 ‘신심들’에 의해 왜곡된 전례주년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지엽적인 관점들을 고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더 나은 성서-교부-전례 신학에 비추어 그리스도 신비의 구세사적 종말론적 시야를 복구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곧 파스카 신비의 풍요로움과 중요성을 복구하며, 전례거행을 통해 우리가 그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잠긴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오늘날 그 열매만을 취하는, 이미 지나가버린 구세사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내면화시키는 은총을 통해 각 사람 안에서 완성되어져야 하는 구세사인 것이다.

 

“성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라는 고전적 양식문에 따른 그리스도교 예배의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적 차원을 살리는 전례주년에 대한 영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도와 의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의 전례에 나오는 성서 본문들을 통하여 영성을 살펴보고 양분을 공급받는 것이 필요하다.

 

 

VII. 전례주년을 통한 사목

 

신도들이 신비 안에 들어가도록, 그리하여 그들의 삶 모두가 하느님께 합당한 영적 제사가 되기 위해 신도들의 모임 안에서 주님과 최대한 접촉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목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념이란 파스카 신비에 초점을 맞춘 성사적 거행에 다름이 아니며, 다른 모든 사건들이 지향하는 이 위대한 구세사건(파스카 신비)에 참석한 이들이 들어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전례주년을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참된 거행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안에서 드러내기 위한 힘과 인식을 얻게끔 하는 사목을 위한 기회로 자주 활용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또한 축일(거행은) 이 축일이 기념하는 사건 안에서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모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히) 수 차례에 걸쳐 갖는 모임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 원인은 전례 거행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복음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전례는 전례 거행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돈독하게 할 줄 아는 신도들의 행위이다. 첫 복음화를 위해 전례주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주년에로 귀착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있게 따르도록 신도들을 전례주년 안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주년에 대한 사목은 전례시기(부활시기, 성탄시기, 사순시기, 대림시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구세사를 부각시키는 가운데 다음의 두 가지 사항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전례주년의 목적을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최대한 참여하게끔 하는 것. 둘째, →그리스도교 입교의 거행을 전례주년의 주기와 연관시킬 것, 특히 부활시기와 사순시기와 연계시킬 것.

 

이 같은 기준에 따라 사목적으로 거행되는 전례주년은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선포와 실현을 위한 왕도(王道)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행은 (개인의) 주관적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성사적 차원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대림시기, →성탄/공현, →사순시기, →성삼일; →시간과 전례)

 

[베르가미니(A. Bergamini), 김인영 역 / 전례학 동호회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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