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5,20ㄴ-26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얼마전 바오로딸 수도회에서 한국 진출 50주년으로 작은 음악회와 함께
송봉모 신부님의 특강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기로 신청을 했다.
강의 주제가 '용서와 상처'에 관한 것이어서 더욱 가고 싶었다.
오전과 오후로 종일 베풀어진 강의와 음악회 내내
먼길까지 서둘러 달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충만했다.
송 신부님의 나직하고 절도있는 유익한 말씀들은
과거의 묵은 앙금을 시원하게 씻어준 폭포수같았고
돌아와 말씀해주신 해법대로 실천해본 결과,
무겁게 가슴에 박혀있던 대못을 쑥~ 빼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며 생각난 말씀 한마디를 소개할까 한다.
신부님은 우리가 흔히 '용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오해 몇 가지를 제시하셨다.
첫 번째 : "용서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해.
두 번째 :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오해.
세 번째 :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는 오해.
네 번째 : "값싼 용서를 진정한 용서로 아는" 오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용서할 수 있고, 또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명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이 부분 때문에 신앙인들은 죄책감을 느끼며 더 크게 괴로운 법이다.)
내가 이해한 신부님 말씀의 요지는 대강 이러하다.
용서는 '나'의 결단, 의지로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자세나 인식, 행동의 변화와는 무관하다.
상대와 관계없는 무조건적인 용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결단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못해 생기는 분노, 화, 증오 등의 생명을 죽이는 독소에서
오로지 '나'를 보호하시려고 하루빨리, 무조건, 용서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나'와 '너'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뿐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와 인식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부정하며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때는 '화해'가 불가능하다.
이럴 때 자신은 이미 용서했노라고 하며, 섣불리 상대에게 화해를 청했다가는
더 큰 상처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행동이 변하고 그가 먼저 악수를 청해오길 기다린다면
영영 화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화해는 언제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 복음 말씀처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즉 내가 상처를 준 당사자일 경우,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