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정으로 인간이 되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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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10-06-14 | 조회수53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다 한때 그들 가운데에서 우리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에페소 2:1-5)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은 죄를 짓고 살고 있는 것이며, 이는 곧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고 싶고 인간답게 죽어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성 안토니오가 말한 것처럼 인간다운 사람은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합니다.
이 여러 가지 언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겸손, 가난, 인내, 그리고 순종입니다.”
숭산 스님은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의 인간 세상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행동하여야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순간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옳은 길이란 무엇인가?
순간순간 당신의 옳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옳은 길을 찾는가?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왔는가? 이 몸은 빈 것이다. 무엇이 이 몸을 움직이는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것을 찾고 싶다면 자신에게 물어라. “나”는 무엇인가?
항상 이 큰 의문을 품어라. 생각은 사라져야 한다. 모든 생각을 버리고 끊어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마음이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수행(修行)을 원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욕망과 화, 무명(無明)을 따른다.
죽을 때 우리는 몸을 가져갈 수 없다.
몸이 사라질 때 무엇을 가져 갈 수 있을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알지 못하지 않은가? 이 모른다가 분명해지면 너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는 곳이 분명해 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늙게 되면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된다고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골치 아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추하게’ 늙어가는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육조사(六祖寺) 선원장(禪院長) 현웅 스님도 <사상관(四相觀)- 아상(我相)을 덜어내는 기초공부>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나는 가끔 인간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물의 영장이니 하며 동물보다 자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놓고 동물보다 더 못하는 행동을 해놓고는 후회하거나 자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만든 상념(想念)이란 근거도 없는 것인데 스스로 만들어 놓고 괴로워하는 것은 마음법의 전도 몽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동물이면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물 또한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동물이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훨씬 더 자신을 덜 자학하게 되고 자신을 너그러이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남의 잘못을 보고도 그 허물을 이해하는데 너그러워집니다. 사실은 그 형상만 다르지 업력(業力)의 차이는 서로 다른 고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는 동물의 습성이 순화되어버리면 자비심이 많은 수준 높은 인간으로 되어 갑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의 갈등은 이런 하찮은 생각들이 앞뒤가 바뀌어져 있을 때 오는 경향이 많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장애를 만났을 때도 항상 자신을 이렇게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을 해보면 자기 정돈이 잘 됩니다.
이런 것은 나의 사유(思惟)에서 나온 것이니 참고될 사람은 참고해도 괜찮지만 항상 이 말이 모든 상황에 다 맞다고 정해 놓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석가불(釋迦佛)이 설해 놓은 『금강경』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붙들려 있는 사람에게 상(相)을 덜어내는 데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공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상 중에 아상이 강한 자는 강할수록 고통을 많이 받고 자신의 문제들은 더 헝클어진 상황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이런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 만약에 참선을 한다던가 어떤 명상을 한다던가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이루어지는 것은 적고 어려움을 만나 부딪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은 모든 인간 삶에 기본이 되는 것에는 틀림 없습니다.”
“구원(救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늘나라에 사는 것”을 말한다.
성령을 받아야 새로운 사람이 된다.
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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