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배움터] 신약성경의 예배 (1) 신약 예배의 형성 지난 호에서 ‘구약성경의 예배’를 살펴보면서 먼저 구약 예배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구약 예배의 3가지 특징 ① 공동체적 차원 ② 역사적, 기념적, 예언적 차원 ③ 내적, 실천적 차원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신약성경의 예배 (1) - 신약 예배의 형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구약 예배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예언자들이 구약 예배를 비판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실천을 통하여 올바른 예배를 확립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형식주의의 유혹에 빠져 구약의 예배가 예배를 이끌어내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도 분리되었고, 예배에 뒤따라야 할 삶으로부터도 분리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언자들의 비판을 몇 가지 살펴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변질된 희생제사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참조. 이사 1,11-17) 예레미야 예언자는 성전에서 참회의 열매 없이 행하는 말뿐인 예배를 고발합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로 믿고 있다. …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참조. 예레 7,3-11) 아모스 예언자는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 예배를 비판합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신적 계획의 증인인 예언자들의 마음이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새 이스라엘과 맺을 ‘새로운 계약’(예레 31,31-33), ‘영원한 계약’(에제 37,26)을 예고하면서, 다가올 새 시대의 새로운 예배로 향하도록 초대합니다. 2. 신약 예배의 형성 구약성경의 예배에서 신약성경의 예배로 넘어가는 과정에 ‘연속성(종속성, 의존성)’과 ‘단절성(불연속성, 독창성, 참신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유다 제의 앞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① 구약 예배에 대한 신약 예배의 연속성(종속성) 먼저 ‘연속성’에 대해 살펴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제의적 실천을 준수하셨습니다. 탄생 시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봉헌되셨고(루카 2,22-24), 축제 때마다 성전을 방문하셨으며(루카 2,41; 요한 2,13; 10,22), 예배 거행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마르 14,49; 요한 18,20) 또한 성전 정화사건(요한 2,14-16)을 통하여 성전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언자들과 동일하게 예배정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마태 23,16-23) 왜냐하면 깨끗한 마음이 없다면 손을 씻는 예식 등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루카 11,38-41; 마태 15,1-11) 율법 전체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의 실천계명으로 요약하신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영역에서 그 가치를 결정짓는 근본조건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과 용서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② 구약 예배에 대한 신약 예배의 단절성(불연속성, 독창성, 참신성)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배를 종결지으시고 새로운 예배를 창립하십니다. 구약성경의 예배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소멸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새로운 계약으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들게 되었고, 따라서 기쁘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여인과 나눈 대화에서 이러한 내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1-24)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라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두고 하신 이 말씀은 형식주의에 치우친 구약성경의 예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새로운 예배의 창립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적 성전이 유다인의 죄악 때문에 파괴될 것이며, 성전이 새로이 건설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새로 건설될 성전이란 당신의 부활한 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요한 19,21)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예배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종결됩니다.(참조. 요한 4,21) 구약 예배에 대한 신약 예배의 단절성(불연속성, 독창성, 참신성)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사건 이후가 되어서야 명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신약 예배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육신은 성전이 될 것이고, 그분의 십자가는 제대가 되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대사제요 희생제물이 되실 것입니다. 3. 글을 맺으면서 먼저 형식주의에 빠진 구약 예배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잠시 우리의 예배가 하느님의 말씀의 신비와 생활실천에 가까이 있는지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예배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실천을 동반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좀더 열심히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빛, 2006년 3월호,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전례꽃꽂이연구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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