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 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여인의 병을 치유하십니다.
당연히 회당장은 분개하고 사람들에게
1주일에 안식일이 아닌 날도 많으니
다른 날 치유 받으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회당장은 나무랄 데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 사람이고,
그의 말대로 굳이 안식일을 어겨가면서
고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옳고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 안에
예수님께서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법은 보는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잘못은 보는데 고통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안에
사랑과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자비하다고 하면
즉시 그리고 보통 잔혹한 살인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심성이 그렇게 잔혹하지 않아도
어떤 이유로건 자비가 없으면 무자비한 것입니다.
법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합리성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며,
정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이고,
심지어 하느님 때문에
자비가 없어도 무자비한 것입니다.
연초에 한 번 말씀드렸듯이 저는 올 해의 경구를
“잘못이 아닌 고통을!”으로 삼았습니다.
올 한 해 이웃의 잘못을 보기 보다는
고통을 더 보겠다는 뜻이지요.
저는 자주 옳고 그름을
심하게 가르는 시비심(是非心) 때문에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지나칩니다.
그것은 회당장이 열여덟 해나 앓은
여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의 눈으로 보면
그 열여덟 해의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고통이 그렇게 큰데도 회당장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은 보지 못하고 큰 것은 잘 보는데
여인에게는 그렇게 큰 열여덟 해의 고통이
회당장에게는 너무도 작은 것이기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고통은 크고 남이 고통은 작다고 해도
열여덟 해나 앓아온
여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하지요.
그런데 어떤 때
우리가 이렇게 너무합니다.
오늘, 너무한 저를 성찰합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작은형제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