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해설] 미사 중의 동작과 몸가짐 걸프 전쟁을 안방 전쟁이라고도 한다. 텔레비전의 쉼 없는 전쟁 뉴스를 보면서 마치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전 첫날, 우리 나라 MBC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하여 바그다드에 가 있었다. 며칠 후 그들의 인터뷰 장면이 방영되었다. 그때 한 기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현장은 생명입니다. 기자가 현장에 나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면으로 전달되는 전황 보도는 우리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전쟁의 아픔(인명 살상과 파괴)이 가려진 채 흥미만을 북돋우고 무슨 스포츠 경기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전례는 현장 예절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미사와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장엄 미사를 집전하셨는데 이 미사가 전국에 중계되었었다. 그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들이 가정에서 텔레비전의 생중계를 통하여 마치 그곳에 동참한 듯한 현장 감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신자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미사를 보았다고 하여 그날 미사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즉 주일 미사의 의무가 텔레비전 중계의 미사로 대체될 수 없다. 전례는 신자가 몸으로 직접 현장에 참여하는 현장 의식이기 때문이다. 전례(典禮)는 한마디로 하느님과 인간이 현세에서 상봉하는 가장 대표적인 현장이 되는 의식이다. 즉 표지(標識) 또는 징표의 장막에 싸여 하느님은 인간에게 내려오시고 인간은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이런 이중적 동향이 전례의 본질적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전례는 인간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적인 행위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성화(聖化)되는 현장이다. 일어나십시오 비신자들이 처음으로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여할 때 가장 계면쩍고 멋쩍은 일은 ‘앉았다 섰다’ 하는 동작이다. 응답이야 입다물고 조용히 있으면 되지만 남들이 모두 일어서 있는데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사 중에 취하는 몸 동작은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즉 일어나고, 앉으며,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 동작이다. 그 밖에도 모이고, 노래하며, 오고 간다. 십자 성호, 합장, 가슴을 침, 침묵 등도 있다. 이런 행동의 통일된 자세는 집회의 일치성과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로써 참석자들의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며 동시에 그것을 북돋아 준다”(미사 경본 총지침, 20항). 물론 예외는 있다. 환자나 노인들은 편한 대로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만일 아프리카의 자이레에서 미사가 시작된다면 시작성가에 맞추어 신자들이 춤을 추며 입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과 관계가 없다면 그대로 보존하려는 것이 전례 개혁의 정신이다. 우리 풍습으로는 미사 중에 춤을 출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제가 제단으로 입장할 때 모두 함께 서서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이며 예수님은 그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선다는 것은 윗사람 앞에서 취하는 예의다. 아브라함이 야훼 앞에서 듣고 청하는 자세(창세 18,22), 용서의 기도(마르 11,25), 깨어 기다리는 자세(묵시 7,9) 등 파견 직전의 자세이다. 그러므로 미사의 입당에서 본기도까지, 복음 낭독과 신앙 고백, 신자들의 기도, 감사송, 성찬식, 영성체 후 기도, 강복과 파견 때에 서 있는다.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 앞에 서 있다. 기립은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이다. 우리는 서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과 이웃에 봉사할 마땅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앉으십시오 성당에서 자리에 앉는 것은 편히 쉰다는 뜻이 아니라, 귀담아 듣고 묵상하는 자세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루가 2,46) 한 것처럼 성서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우선 듣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10,17)고 하였다. 그래서 독서와 응송, 강론 중에, 그리고 봉헌과 영성체 후에도 앉는다. 그것은 또한 조용히 기다리고 기도하며 묵상하기 좋은 태도이다. 예수님께서 첫째가는 계명을 가르치실 적에 “이스라엘아 들으라.”(마르 12,29) 하셨고 몸소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4,3.9). 듣는 자세는 단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열어 놓으며(사도 16,14) 또한 말씀을 실행하고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마태 7,20-26 참조). 목례와 절 머리를 숙이거나 상반신을 굽혀 절하는 것은 자기 비하(卑下)요, 손윗사람, 선생님, 상관에 대한 존경과 인정의 표시이다. 또한 요청과 보호의 뜻도 있다. 특히 신앙인에게는 경외(敬畏), 참회, 기도의 자세이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 이후부터 절의 방법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다. 머리를 숙일 때는 세 가지로 깊게, 중간쯤, 가볍게 하며 몸을 굽혀 절할 때는 두 가지로 깊은 절과 가벼운 절로 나누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 미사 경본에는 머리를 숙이는 자세[목례]와 몸을 굽히는 자세[깊은 절]의 두 가지만을 강조하고 있다. 미사의 참회 예절, 평화의 인사, 천주의 어린양, 사제의 축복에 머리를 숙이고, 거양 성체와 영성체 때에 깊은 절을 한다. 성체 감실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깊은 절을 하도록 할 것이다. 절은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다. 장궤 요즘 장궤틀 없는 본당이 꽤 많다. 물론 보다 많은 신자들이 앉도록 배려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고 교회 전통상 절이 장궤보다 먼저 있었고 새 미사 경본(지침 21항 참조)에도 각국 주교 회의가 민족의 풍습에 따라 고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규정이 없다면 성체 축성 때에는 무릎을 꿇도록 되어 있다. 실상 기도는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행할 적에 가장 정신 집중이 잘 된다. 예수님도 땅에 엎드려서(마르 14,35) 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루가 22,41). 장궤나 엎드림은 하느님께 대하여 자신의 비천함과 미소함을 드러낸다. 신자들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할 때나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는데,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 앞에 나선 모습이며 겸손과 경외심의 표시이다. “아버지, ……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걸음, 오고 가는 것 인생은 거래(去來)요 왕래(往來)다. 오고 가는 것이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사람은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신자가 성당에 다니지 않을 때에 냉담자라 하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게 금지된 사람을 파문(破門)된 자라 한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거래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길 가는 이나 버스 타고 가는 사람이나 모두 목표가 있다. 신자가 성당에 간다는 것은 하느님을 목표로 한다. 즉 가서 만나 뵙는 마음의 자세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의 목표는 말씀 안에 계신 하느님과 성체 안의 그리스도이다. 말씀의 하느님께, 성체 안의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께 걸어가고 오는 과정에서 무슨 거래를 하였는가? 충실하고 준비가 된 참여자는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모시게 된다. 그리스도를 받아 모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뿐 아니라 그분의 은총, 사랑, 지혜, 가쁨, 축복, 평화, 구원, 영생, 영복이 오고 간다는 뜻이다. 걸어간다는 의미를 세 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전형적 움직임이다. 걸음은 몸 전체의 활동이고 손과 발의 율동적인 조화이다. 둘째로 직립 보행은 인간만의 품위를 상징한다. 신자들의 행렬이나 성지 순례의 모습은 하느님 백성의 여정(旅程)이요 나그네길을 상징한다. 아프리카 교회 공동체의 춤 행렬도 한 축제의 여정이다. 셋째는 기도나 성가를 부르면서 또는 침묵 중에 걷고 행렬하는 것이 교회 전례의 핵심이요 특성이다. [경향잡지, 1991년 4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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