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제는 어느 수녀원 피정 지도를 하였습니다.
강의를 하는데 앞에
어린 수녀님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뒤의 나이 든 수녀님들과 비교가 되면서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맑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언젠가 티브이를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은 배우가 나왔는데
피부만으로도 너무 예쁜 것입니다.
갓난이는 그 피부만으로도
너무 예뻐 깨물어주고 싶은데
그런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지요.
눈이 커서 아름답다든지,
윤곽이 뚜렷해서 아름답다든지,
대칭이 잘 맞아서 아름답다든지,
화장(Make up)을 잘 해서 아름답다든지,
하여튼 여러 기준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름다움은
이와 같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잘 난 모습의 아름다움도 아니고
잘 가꾼 아름다움은 더더욱 아닙니다.
無染의 아름다움입니다.
천지창조 이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름다움입니다.
두 번째 독서 에페소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마리아도 하느님께서
어머니로 미리 선택하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그 어머니 되실 분을
미리 흠 없는 분으로 만드셨습니다.
마리아가 너무도 아름답고
흠 없기 때문에 어머니가 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공로를 보시고 그리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그리 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으셨을까요?
인간에 의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바뀔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시기로 되어 있었으며
꼭 마리아가 아니어도
오실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축일은 인간의 공로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先 구원계획을 깊이 성찰하는 날이며,
이 구원계획 안에
우리가 있음을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와처럼 “자기” 안에 있으면
오염된 我相으로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지만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으면
새로운 하와처럼 무염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것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작은형제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