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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 어디 있느냐?” - 12.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8 조회수356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8. 수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창세3,9-15.20 에페1,3-6.11-12 루카1,26-38

 

 

 

 

 

 

“너 어디 있느냐?”

 

 

 

주님은 아담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지체 없이 대답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는 좋은 삶, 바른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지위나 자리에 상관없이 누구나 살 수 있는 좋은 삶, 바른 삶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과목 중 첫째 번에 온 과목이름도 ‘바른 생활’입니다.

삶이 좋아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삶이 바라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동도 바릅니다.

삶이 좋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머리로 노력해도

좋은 생각, 좋은 판단, 좋은 말, 좋은 글, 좋은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삶이 바르지 않고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른 생각, 바른 판단, 바른 말, 바른 글, 바른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삶은 우리 모두의 바탕이며 뿌리입니다.

 

어느 분이 들려 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본당의 성전을 새로 짓고 이사 가자,

전에 임시로 빌려 사용했던 건물이 당구장으로 변한 것을 보니

마음이 참으로 착잡 미묘했다는 것입니다.

순간 신자생활도 저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합니다.

성당 같은 거룩한 생활을 하다 당구장 같은 속된 생활로의 전락입니다.

충실할 때는 성당 같은 생활이었는데

냉담으로 당구장 같은 생활로 전락한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거룩한 미사 도구인 성작과 성반도 제대위의 제자리에 있을 때 빛나지,

제대의 제자리를 떠나면 아무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밥그릇으로 씁니까?

국그릇으로 씁니까?

 

한 결 같이 좋은 삶, 바른 삶을 살기다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절로 좋은 삶, 바른 삶이 아닙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배나무들 전지를 통해서도 이런 진리를 깨닫습니다.

전지하지 않고

배나무들 자연 그대로 제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무 꼴도 열매도 말이 아닐 것입니다.

도저히 희망도, 대책도 없을 것입니다.

매년 전지로 정리하여 꼴을 잡아주기에

열매도 나무도 잘 관리할 수 있어

희망을 갖게 되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습니다.

교육도 삶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제 멋대로의 전지 없는 삶, 절대로 좋은 삶, 바른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전지할 때

참 좋고 바른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모 마리아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자리가 좋아야 좋은 삶, 바른 삶입니다.

 

장소의 자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 안에 깨어 정주할 때 좋은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보다 더 좋은 자리도 없습니다.

하여 주님은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깨어 살 때 안정과 평화요 넘치는 축복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언제든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즉각 뛰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을 실감나게 체험하는 장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평생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살았던 사도 바오로의 증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제자리는 ‘그리스도 안’입니다.

늘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영원한 생명에 참 좋고 바른 삶, 아름다운 삶입니다.

 

 

 

순종하는 삶일 때 좋은 삶, 바른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저절로 순종의 삶입니다.

 

눈 밝은 하느님은 이런 이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순종의 사람, 마리아를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참 깊은 믿음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어 전개되는 천사와 마리아와의 대화는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지요.

군더더기 말 하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 마리아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의 응답이 있었기에 구원 역사가 가능했습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이 없으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순종이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받은 상처와 실망이 말끔히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때까지 기다린

하느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자세와

복음의 마리아의 자세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왜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었느냐고 추궁하는 하느님께 대한

아담의 대답이 참 불손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바로 이게 원죄에 물든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겸손과 순종의 분위기이기는커녕 반항과 불순종의 분위기입니다.

여자 역시 책임을 전가합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

구차한 변명과 핑계가 뒤를 잇습니다.

비겁하기가 주체적 자유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죄가 온 공동체에 퍼져가는 모습이

마치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가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아내인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 합니다.

책임지는 ‘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의 파탄이요

고립된 나로, 자기의 실종입니다.

바로 이게 죄 중에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현주소입니다.

순종의 사람은 누군가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변명이나 핑계도 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마리아 같은 순종의 사람이었다면,

‘너 어디 있느냐?’ 주님이 물었을 때

즉시 뛰쳐나와 잘못을 고백했을 것이며

하느님도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 본원에 다녀오던 중

괴산 휴게소의 식탁 위에

‘아름다운 날들을 만드는 말’이라는 제하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중 몇 가지를 인용합니다.

‘마음을 넓고 깊게 해 주는 말-미안해’

‘겸손한 인격의 덕을 쌓는 말-고마워’

‘사람을 사람답게 자리 잡아 주는 말- 잘했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말-내가 잘못 했어’

‘날마다 새롭게 감미롭게 하는 말-사랑해’였고,

이런 말을 진정성을 담아 사용하는 이들이

진정 겸손한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긴말이나 글이 아닌

진정성 담긴 짧고 순수한 말이, 글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주님은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참되고 좋고 아름답게(眞善美)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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