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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먹보요 술꾼이라 불리신 예수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0 조회수1,137 추천수18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2 주간 금요일 - 영적 무관심과 영적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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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불타오르는 신앙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마을 곳곳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변으로 나가 바다에 대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크게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저는 ‘내가 만약 평신도라면 굿뉴스에 들어와 매일 복음 묵상을 열심히 찾아 읽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 때마다 ‘너무 바빠서 안토니오의 설교를 듣기를 원치 않은 사람들 같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고 이렇게 말씀을 찾는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아무리 즐거운 가락으로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어깨를 들썩이지 않고, 아무리 슬프게 울어도 가슴을 치기는커녕 무관심하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적 무관심’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 세상 즐거움에는 귀가 번쩍 뜨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는 영 무관심한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며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라고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 던진 채 더 이상 들으려하지 않고 나가버립니다. 사실 진리가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 어떤 아이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밥을 세 개의 그릇에 담아놓고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 하나에다는 좋은 말을, 또 다른 하나에다는 욕을, 나머지 하나는 그냥 무관심하게 방치해 두었습니다. 좋은 말을 들은 밥은 발효하여 좋은 냄새를 풍겼고 나쁜 말을 들은 밥은 상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일 검고 안 좋게 상한 것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무관심하게 방치해 둔 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선 이것이 거꾸로 일어납니다. 즉, 무관심한 사람이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시지만 관심이 없는 이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인들처럼 뜨겁거나 바오로처럼 아예 차갑다면 회개시키기나 하겠지만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 부패해갑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해왔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있는 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시며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자체가 하느님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관객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그만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것이 바로 그분의 사랑을 무시하는 폭력입니다.

 

이 영적 무관심 다음으로 힘들어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 고집’입니다. 이미 자신이 다 판단해 놓고 자신의 생각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며 그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모습의 예언자와 메시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은 듣지만 자신의 생각은 바꾸려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자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고집이고 이 영적 고집이 있는 사람에겐 생명의 말씀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고 맙니다.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바로 순명하고 자신을 굽힐 줄 아는 겸손함과 온유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은 당신을 ‘스승’으로 삼고 매 순간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는데 처음엔 그 분의 말씀에 관심도 없었지만 나중엔 그분을 스승님으로 삼고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며 자신을 변화시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처음으로 목격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그 때에도 “랍부니”, 즉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가르침에 무관심한 것이 그분께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그분의 가르침을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이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분에 대해 단 하나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에 대한 슬픔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먹보요 술꾼이라 불리신 예수님

 

어제 박사 논문 발표를 일주일 정도 남겨 둔 수녀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분이 논문발표를 하는 것을 보고 와서는 겁을 집어먹고, 자신의 논문 발표가 너무 걱정이 되어 잠도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기도 좀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을 아무리 해도 이미 써서 제출한 논문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단 받아들여졌고 공적으로 논문 발표 날자가 정해졌다면 일반적으로는 학위를 받게 된다고 보아야합니다. 걱정을 해 보아야 변하는 것도 없는 것을 잘 알지만 몸은 머리를 따라주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논문 발표를 남겨놓게 되면 어떤 심정일지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성서 석사 때 논문을 다 써서 제출해놓고 교수님과 관계가 좋아지지 않게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논문 발표 날 어떻게 되는지 한 번 보자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제출을 했으니 학위는 받는 것이고, 공부가 싫어져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교수님은 당신이 일일이 다 교정해 주신 논문을 남들 것을 베껴서 쓴 것이라고 함께 앉아있던 교수들에게 말함으로써 성경으로는 박사를 이어서 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 쓴 논문을 발전시켜 박사논문으로 만들어보자던 교수님의 말이 순식간에 바뀌게 된 것입니다. 논문은 바뀌는 것이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고 사람의 판단은 참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좋은 칭찬을 듣는 것이 창피한 일일 것입니다. 소매치기는 소매치기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합니다. 이번 국회에서는 300조가 넘는 예산을 유혈폭력 사태까지 일으켜가며 단 3분에 통과시켜도 그것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집단에 속하게 되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란 그래서 올바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어느 순간 나를 미워하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고 싶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불가능하고 유익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나를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더 잘 보이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이 그렇게 판단하고 싶어서이지 나의 삶과 크게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살아도 못 박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바꾸려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나에 대해 판단해 줄 때,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면 바꾸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판단 때문에 휘청댄다는 것 자체가 더 창피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말로만 하느님이 나의 유일한 심판관이라 말하면서도, 이웃의 평가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살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인들을 판단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사실 사제가 요한처럼 극기의 생활을 하면 교회 안에서도 얀세니즘이라느니,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라 불렸는데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며 친교를 살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면, 사제가 흥청망청 살아간다고 비판합니다. 그것이 두려워 단식해야 할 때 하지 않고, 술 마셔야 할 때 마시지 못하면 정말 어리석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비판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도 옳고 당신도 옳다는 것이 두 분이 이루신 “일”로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산을 오르는 방식이 여러 가지듯 사는 방식도 여러 가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일일이 알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잘못된 판단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판단들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당신이 이루시는 일이 하느님 뜻에 맞는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정의롭게 판단하셨는데 자질구레한 것을 가지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 때문에 흔들려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점점 더 좋은 평가를 기대하게 된다면, 하느님께로부터는 그만큼 멀어졌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 아무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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