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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이신 지혜는 함께 어울려 놀자 하십니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0 조회수382 추천수6 반대(0) 신고
 
 

말씀이신 지혜는 함께 어울려 놀자 하십니다 - 윤경재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11,16-19)

 

 

어렸을 적에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를 편 갈라 공연히 다투고 놀던 기억이 납니다. 남자애들은 주로 자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등을 하고 놀았습니다.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함께 놀 인원수가 부족하면 공연히 남들이 노는 데를 기웃거리며 혹시라도 끼워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도 끼워 줄 낌새가 보이지 않으면 심술이 나 훼방을 늘었습니다. 남자애들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치거나 공깃돌을 집어 달아났습니다. 그러면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공연히 시비가 붙어 윗동네 아랫동네가 원수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간혹 두 동네 사이가 좋아지면 어울려 하는 놀이가 있습니다. 두 줄로 마주 보고 서서 깽깽이 발을 구르며 뜁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하고 한편에서 물으면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라고 응답하거나 ‘먹을 거를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개구리 반찬’이라는 말이 나오면 와! 하고 놀란 듯이 도망쳤습니다. 이 놀이는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도 그다지 없어서 남자애들은 시큰둥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신 까닭은 아이들이 서로 토라져 이런 놀이를 하자고 해도 싫다고 손사래 쳤고, 저런 놀이를 하자 해도 도리질 쳤듯이 대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보이신 언행과 기적을 나와 상관없는 이웃집 불구경하듯이 대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무반응과 무관심’을 엄하게 질타하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11,21)

성경에는 지혜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르침이 넘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무릎을 치며 탄성 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이 빈말로 끝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실천하셨고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간혹 가혹하게 들리는 예도 있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8-29)

이 말씀은 지나쳐 도저히 평범한 인간으로서 지킬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과장법인 것처럼 생각하고 깊이 되묻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가혹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은 공포감을 주고 죄의식을 심어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의 차원이 육신의 차원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의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차원에서는 몸이 실제로 움직여야 죄가 성립하지만, 깨달음의 세계는 육신의 세계와 달라서 보는 대로 실현된다는 것을 알아채라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를 직관하면 하늘나라가 실현되고 지옥을 직관하면 지옥에서 헤매게 됩니다. 사람 생각은 자유롭고 빛보다 빠른 법입니다. 그러니 생각마저도 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을 살다 보면 갖가지 사건과 마주칩니다. 성공과 실패, 행운과 불행 등이 꼬리 물고 닥쳐옵니다. 그런 중에 우울한 감정이 들면 곧바로 “나는 우울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우울한 것이 아니라 우울을 체험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또 “나는 기쁘다.”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내가 기쁜 감정을 지금 느낀다는 것뿐입니다. 언제 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스쳐 갈 그 일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본래의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환상이 나를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푸른 하늘은 언제나 그대로 있는데 그 아래에 흐르는 구름이 온갖 날씨를 형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바람 폭풍우에 휩싸여 시달렸던 기억 탓에 나약해진 육신이 구름이라는 환상에 빠져 어쩔 수 없었던 자기를 위축시키고 맙니다. 이유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말씀마저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향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꼴입니다. 지혜의 목소리에 눈을 뜬 사람은 인생의 길에서 울려오는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곡소리에 맞추어 가슴을 칠 것입니다. 본래의 자신을 잃지 않고서 주님과 한바탕 어울려 즐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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