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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12일 야곱의 우물- 마태11,2-11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2 조회수388 추천수6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2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하고 물었다. 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8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 예언자냐 ?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놓으리라.’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에게 주님을 알아뵙는 믿음을, 그리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독서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부분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고 (2–6절), 둘째 부분은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7–11절).
앞부분에서는 요한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어쩌면 요한만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도 드물었을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이들에게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심을 알려주었고 (마태 3, 11),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드리기에 부당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분께 세례를 드렸으며, 그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까지 들었습니다 (3, 17).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던 요한 자신이 지금은 마치 그 확신을 잃어버린 듯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11, 3) 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그러한 의혹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이 오실 그분이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례 받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요한의 예상과 달랐던 것일까요 ? 어쨌든 요한은 믿음의 어둠을 겪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보고 듣는 것’ 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입니다. 눈먼 이들, 나병 환자들, 귀먹은 이들이 치유를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그 응답을 끝맺는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을 읽는 제 눈길을 멈추게 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6절)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사도에게 말씀하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선포가 ‘보고’ 믿었던 토마스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 못하는 다음 세대, 곧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이 복되다고 선언하는 것이듯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말씀 역시 이미 의심을 드러낸 요한한테보다 오히려 우리를 향해, 우리가 의심을 품지 않는다면 요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마지막 말씀이,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질문한 것은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에게 하신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우리를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보고 듣는 것” 이 믿음의 근거라고 하신다면 (마태 11, 4)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 2천 년 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를 저는 이들이 걸었다는 것 ?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확인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닐까요 ? 복음의 뒷부분을 보며 다른 시각에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군중이 떠나간 다음 예수님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사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그 요한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하고 물으십니다. (7절)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았느냐 ?’ 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를 나는 알아볼 수 있을까요 ? 예수님보다 앞서 왔던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또 그들 안에서 ‘오실 분’ 이 와 계심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
‘믿음은 환하지만 믿음의 길은 어둡다.’는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요한이 감옥에서 겪은 것과 같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도 믿음의 근거를 찾습니다. 그들한테도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근거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입니다. 고운 옷을 입은 자들을 보러 왕궁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찰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는 것이 믿기 어렵다면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없다면 ….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한 조각, 내가 있는 그곳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적과 계획들을 많이도 행하셨으니 그 누구도 당신께 견줄 수 없습니다. 제가 알리고 말하려 해도 헤아리기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편 40, 6)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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