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 주간 수요일 -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어떤 분들은 사제로, 또 수녀님으로 수십 년 사셨어도 아직도 당신의 성소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부르심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계속 자신의 성소가 혹 결혼 성소가 아닐까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성소, 거룩한 부르심)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베드 1,10)
성소는 결코 죽기까지 찾아가야 할 무엇이 아닙니다. 지금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결혼한 신자가, ‘내 성소는 이게 아니었나보다.’ 혹은 성소자가, ‘내 성소는 결혼 성소인가보다.’라고 한다면 결코 온전히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소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성소가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다를 사도로 직접 부르셨고 뽑으셨습니다. 그 성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바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응답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계속 성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죽기까지 흔들리기만 하다가 끝나버릴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첫 기억이 조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하게 하여 제가 평생 행복이란 것을 찾도록 섭리해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원하다가 나중엔 사제의 길이 참 행복임을 깨닫고 이 길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에 확신이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고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후회나 흔들려본 적이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믿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만약 커서도 계속 ‘부모님이 정말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오신 걸까?’라고 의심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우면 그 농담이 진담처럼 들려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참 부모님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확신이 가능할까요? 바로 살아오면서 나에게 해 주었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증언 등을 생각해보면 꼭 눈으로 보지 못했더라도 어떤 확신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부모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요한이나 안드레아과 같은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고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요한은 직접 가서 그 분이 참 메시아인지를 여쭈어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보여주시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요한이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즉, 제자들을 보내어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어보게 하여 그들에게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여러 가지를 묵상해보고 저절로 부모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믿음이 올 수 없고 그렇다면 세상살이는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삶의 힘이지만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을 겪어도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제 생각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성소는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배반하게 될 왜 유다를 뽑으셨겠습니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유다가 사도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고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만큼 그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흔들릴 필요 없이 자신의 성소에 대해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제자가 될 것인지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결혼을 하거나 독신으로 사시는 분들 또한 그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누가 어떤 길을 가던지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구체적인 성소에 대한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의심을 품지 말고 확고히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합시다.
믿음과 행복
유학 나와서 시험 볼 때보다 더 긴장되는 때는 자신이 쓴 논문을 교수에게 제출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저도 처음 몇 장 써서 교수님께 제출하고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걱정되어 음식을 먹고 체하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교수님은 지금까지 잘 받아주셨습니다. 즉, 논문을 써서 내고 했던 걱정들은 다 쓸데없는 걱정들이었던 것입니다. 맘 편하게 살아도 부족한 시간에 우리는 쓸데없이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걱정하며 살게 되는 이유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갈릴레아 호수에서 풍랑이 일어 배가 가라앉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당장 죽을까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을 그들은 자기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다가 쓸데없이 에너지만 소비하고 두려움에 떨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약한 믿음을 질책하십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하는 것은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가장 힘들 때는 사랑하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할 때입니다. 반대로 가장 행복할 때는 상대의 사랑을 확인 받았을 때이겠지요.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가 제일 힘든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군대 갈 때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한 자매에게 군대 있는 동안 연락이 오지 않자 그 군 생활이 지옥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어찌 된 건지 궁금했고 ‘탈영을 이래서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오히려 쉽게 체념이 되었고 마음도 편해졌었습니다. 무언가 확실해 졌기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행복한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관계가 믿음 안에서 완전하기 전까지는 그 관계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사랑을 확인하고도 연인들은 서로서로에게 계속해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합니다. 만약 서로의 관계 안에 ‘의심’이 들어온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야 됩니다.
또한 이는 단지 두 사람에게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만큼 믿기 어려운 존재도 없습니다. 의지가 약해 너무 쉽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아무리 힘든 일을 하여도 즐거울 수 있는 반면에 그 분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마치 부모 잃은 고아처럼 외롭고 힘든 삶만이 남게 됩니다. 이때는 풍랑 때문에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처럼 조그마한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걸어갈 줄 아셨습니다. 믿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곧 그만큼 교만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아지려 교만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의심해서 죄를 짓고 처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즉,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교만해서 그렇고 믿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두려움은 상대를 판단하고 미워하게 만듭니다. 저절로 상대가 판단되고 미워지게 된다면 교만해서 믿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서로서로에게 핑계를 대며 하늘나라에서 쫓겨납니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믿음은 지옥입니다. 즉 교만하여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두려워지고 두려워져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영성’이라 말할 때 영성은 다름 아닌 ‘잃었던 행복을 다시 되찾는 방법’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 영성의 길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교만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은 죄인이니 자신을 떠나달라고 합니다. 또 물 위를 걷다가도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의심을 품고 물에 빠집니다. 아직까지 남아있던 교만은 하룻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며 깨끗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세 번이나 예수님께 눈물을 흘리며 사랑을 고백합니다. 다시 사랑하게 된 것이고 다시 행복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죽기까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 잘 말씀해주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
사랑해야 행복한데 사랑하려면 믿어야합니다.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보았듯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DNA 검사를 해 보자고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 아이 참 똑똑하다고 하시겠습니까? 똑똑한 것이 아니고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심을 품고 기적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아기는 부모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그래서 더 믿고 그래서 더 행복한 것이 가톨릭 영성의 전부입니다. 겸손하게 되는 것이 곧 영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