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귀중한 전통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2천년 묵은 커다란 고목인데 전례에서도 그렇고...
또 교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현대화가 됐다고 하더라도 우리 교회 안에도
이 시대사조에 맞춰서 귀중한 것들을 생략하고 잃어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죽습니다.
그만큼 어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교묘하게
사제의 분별을 막고/ 또 교회의 분별을 막아서 세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대림절 기간에는 제대위에 꽃을 꽂지 않습니다.
아주 검소하게 대림4주를 보내는데 그러나 대림3주일이 되면
장미주일이라고 해서 그날 사제는 일 년에 한번 장미색 제의를 입습니다.
아마 그런 걸 처음보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요?
그만큼 교회가 그 전통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그 뜻이 아닌가!
대림절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주님의 강생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대림4주 동안에 이 3주만큼은 미리 주님의 강생을 당겨서
마음속으로 기쁨을 준비하게끔
장미 주일로 정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준비를 시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거의 장미 주일을 지내는 본당은 거의 없을 겁니다.
기도서 책에도 보면 자선주일이라고 하는 표현은 나오지....
자선주일은 인간이 만든 거지만 장미주일은 2천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이었던 것인데
이 장미주일마저도 교회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전례의 뜻을 모릅니다.
전례의 흐름을 모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어떡하라구요?
전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에 빨리 질러가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교회의 전통 안에는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켜야 됩니다.
향을 안 피우는 본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축일이 되어도 향을 피우지 않습니다.
첫 토요일 안 지킵니다.
첫 금요일, 첫 목요일 안 지키는 본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제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뜯어 고칩니다.
그건 천주교가 아닙니다.
전통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사제의 정신도 전통으로 돌아가야 되고
그러한 사제 밑에서 교우들도 교회의 전통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성령을 체험해야 될 겁니다.
어느 본당에서 영성체를 하는데 신부님과 수녀님이 같이 영성체를
이렇게 분배를 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신부님 줄에는 잘 가려고 하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수녀님 줄에는 길게 늘어섰습니다.
신부님은 너무너무 섭섭하고 서운했습니다.
내가 교우들에게 뭐 잘못한 게 있길래 왜 나한테는 성체를 받으러 오지 않을까?
해가 지고 남자교우들을 저녁 때 불러서 술을 한잔 먹이면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렇게 나를 가슴 아프게 합니까?”
하니까 처음에 한두 잔 먹고는 말을 안 합디다.
그러나 나중에 술을 여러 잔 먹더니,
“신부님~ 신부님 줄에 서지 않는 것은.....이유가 있습니다.”
교우들이 신부님에게서 뭘 많이 봤느냐?
오른손 둘째손가락으로 코딱지를 쑤시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신부님이 하도 잘 쑤시니깐....
꼭 둘째손가락 첫째 손가락 가지고 성체를 주시지 않습니까?
그래 신자들이 아주 찝찝해가지고 신부님 코딱지 쑤신 손가락으로
성체 받긴 그렇다 해가지고 수녀님한테 가는 것이니까
신부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 앞으로 쑤실 때는 왼손으로 쑤시기 바랍니다.
진짜 있었던 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얘기가 전해져옵니다.
어렸을 때 초등학교 다닐 때 좋아하는 선생님이 누구나 있었을 겁니다.
저도 너무너무 좋아하던 그 당시 교대를 졸업하고 실습을 나온
교생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은 보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참 예뻤어요..
그리고 위에 누나가 없던 나였기 때문에 그렇게 정이 가고
어떻게 해서든 말 한번 걸어 보려고 그 선생님만 바라보면 가슴이 뛰고~~
아마 그게 제 첫 짝사랑 이였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그 선생님이 인사를 하면서 씨~익~ 하고
그 예쁜 입을 벌려서 아름다운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짓는데......
세상에~ ~얼마나 커다란 고춧가루가 하나 끼여 있던지.....
사람이 싫어지고 실망하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그담부터는 보기도 싫습디다.
‘정말 공인은 조심해서 살아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부모를 보고 자식이 흔들릴 수도 있고 자식이 중심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본당신부가 흔들릴 때는 신자들이 같이 흔들립니다.
공동체가 다 같이 흔들려버립니다.
공인은 어떤 위치가 되더라도 프로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하 감방에 갇혔습니다.
갇힌 이유를 아시지요?
그 당시 유대왕이었던 헤로데왕 입빠스가 로마에 있는
자기 동생을 방문했다가 제수를 겁탈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이혼하고 동생에게서 뺏은 제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세례자 요한이 단호하게 책망하다가 갇힌 겁니다.
요한은 분명 그 옥중생활이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광야출신이요, 넓고 탁 트인 광야에서 맑은 바람을 호흡하고
하늘을 지붕 삼아 살던 그 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그 좁은 감옥은 죽기보다 싫었을 겁니다.
지금은 지하 감방 안에서 죽음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
아무리 대가 센 요한 이였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 분명히 많이 흔들렸을 겁니다.
사실 요한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 이유가 메시아를 예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주었던 그분이 정말 메시아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묻습니다.
“당신이 정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가 맞습니까?”
조바심에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제는 내 뒤에 오는 메시아는 내가 이제껏 예언했던 대로 분명히 심판을 하실 것이다.’
생각하고 있었을 겁니다.
언제 이 예수님이 행동에 옮기실까!
언제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것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요한이 가르친 것은 두 가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하느님의 정의를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징벌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뭐라 그러셨습니까?
내가 메시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본대로 너희 스승에게 전하라!”
두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육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전해라!
두 번째는 내가 영혼의 주인이라고 하는 거를 전해라!
육신의 주인이라고 전하는 거를 뭐라고 하셨습니까?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이가 살아난 것, 너들이 보지 않았느냐!
내가 바로 육신의 주인이심을 가서 전해라!
치유시켰다고 하는 것을 전해라!
영혼의 주인임을 전하라고도 또 얘기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거, 그래서 절망에 찌들었던 그들이
희망과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을 니들 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대로 니 스승에게 전해라!
영과 육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하는 것을 본대로 전해라!
당신의 입으로 내가 메시아라고 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 세상의 주인임을 분명히 너희들이 본대로 전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세례자 요한을 향해서 뭐라고 합니까?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
의심을 품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분명히 예수님은 서운한 마음이 드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할까?
몸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군중에게 요한을 높이 올려주지요?
뭐라 그럽니까?
요한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광야에서 살던 그가 사치한 옷을 입은 것 니들이 본적이 있느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모든 예언자보다 훌륭하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요한보다 높은 이는 없다.
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극찬을 합니다.
떠받들어 줍니다.
그러나 즉시 뭐라 그럽니까?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보다도 크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올려 줄 때는 언제이고 또 갑자기 떨어뜨립니까?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서 아무리 훌륭한 성인예언자라 하더라도
신약백성보다는 저 밑이다...이 뜻입니다.
요한이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요,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이지만
어디까지나 구약의 인간입니다.
신약의 인간인 우리보다 요한이 무엇이 모자라서 예수님이 그런 얘길 하셨을까?
구약의 인간들은 세 가지 신비를 모릅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신비를 모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을 알고 선포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낸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부활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부활을 못 봤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인간인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믿고 살기 땜에 우리들이 세례자요한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세 번째, 복음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멸망의 경고였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론상으로 오늘 주님이 얘기하신대로 우리는
구약의 아브라함보다/ 이사야보다/ 예레미야보다/ 그리고 세례자요한보다
분명히 하늘나라에서는 윗자리에 있는 것이 이론적인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세례를 통해서 신약의 인간이 되고,
교회에 입문해서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 해서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저는 어제께 새 영세자들 25명을 영세시켜드리면서
‘여러분들이 이제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길로 들어섰는데
구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자동 벨트가 되어
저절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니고
잘못하면 뒷걸음칠 수도 있고 오히려 구원의 문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구원의 문안에 들어서서 주님이 계신 저 천국을 향해서 가려면
네 가지의 영적훈련을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제 영세 받으신 분 어디계십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첫 번째, 기도의 훈련을 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인 아주 작은 기도라고 하더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큰 저수지가 작은 구멍에 의해서 뚫리듯이
몸 아프다 뭐 피곤하다 바쁘다고 기도를 놓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영혼은 마른 논바닥 갈라지듯이 짝짝 갈라집니다.
그리고 늘 명심해야 될 것은 봉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봉사와 기도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될 때는 봉사쪽을 포기하시고 기도를 잡으십시오.
기도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을 때는 구원의 문밖으로 떨어집니다.
두 번째 영적훈련은 성사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셔야 되고 일주일에 한 번 성체 영하는 거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성체 영하는 거 가지고는 일주일 내내 나에게 덤비는
마귀와 싸워 이기기에는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틈이 나는 대로 평일미사에 참석해서 성체를 한 번이라도 더 영하셔야 합니다.
세 번째 영적 훈련은 봉헌의 훈련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늘 첫 자리에 입으로만 모실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올바른 봉헌을 하시라 그랬습니다.
‘하느님에게 드리는 헌금은 가장 정성스럽게 드려야 되고
내가 가진 돈 중에서 제일 깨끗한 것을 골라서 드려야 되고
교무금도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서 봉헌해야 된다.’ 그랬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냉담 하는 이유의 육십 프로가
하느님과 약속했던 그것을 자꾸 미루고미루고....밀리고 밀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성당와도 기쁨이 없고
하느님에게 봉헌해야 될 기쁨의 돈이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마귀의 돈으로......
부채로 남습니다.
하느님 것을 먼저 찾고
하느님에게 올바른 봉헌의 삶을 사셔야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영적훈련은
'공동체 안에서 친교 생활하는 거 소홀히 하지 말라.'
혼자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잘난 척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지금 얘기한 네 가지의 영적훈련
기도의 훈련/ 성사의 훈련/ 봉헌의 훈련/ 친교의 훈련....
이 네 가지의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아무리 예수님의 입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신약의 인간이 더 위대하다!’
하는 소리를 들은 우리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구덩이로 떨어지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겁니다.
세례 받은 것 그 자체가 천국을 표시해주질 않습니다.
십자가의 신비, 부활의 신비, 복음의 신비를 알고 있는 우리 신약의 인간들 얼마나 행복합니까?
구약의 백성들은 그거를 몰랐습니다.
미사 때마다 성체와 말씀으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과 복음을 우리들안에 넣어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미사 때도 세례자 요한은 죽었다 깨도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사제의 입을 통해서 얘기해주셨고 당신의 몸까지 주신다고 하는
이 거룩한 장미주일, 기쁘게 봉헌하도록 애씁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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