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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의 섭리 안에 있는 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7 조회수1,129 추천수2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3주간 금요일 - 영성의 세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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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그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늦게 결심해서 들어온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동기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만약 형이 하느님께 가면 하느님은 잘 살았다고 칭찬해 줄 거야. 그러나 누구와 함께 왔느냐고 물으면 뭐라 할 거야?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가고 있는데 혼자만 왔느냐고 하면 뭐라 대답할거야? 쓰러지는 친구들과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고민하는 친구와 함께 고민해 줄 수는 있지만 함께 쓰러지는 것이 사랑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가 굳건히 서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든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병을 더 잘 알기 위해 자신도 병이 드는 의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잘산다.’는 말을 여러 번 듣다보니 스스로도 내 자신이 좀 냉혈인간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혼자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가슴이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3학년 마치고 유학 나올 때 여러 친구들이 눈물을 흘려주었지만 저는 눈시울을 적신 적이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슬픈 영화 볼 때는 많이 울면서도 정작 눈물이 나와야 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가슴으로 지나치게 머리만 쓰며 산다는 느낌을 항상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감정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가슴이 뜨거운 것이라 착각할 수도 있는데 가슴으로 사는 것이 겉보기에는 감정적으로 사는 것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도 이 구조를 따릅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감정은 호수의 표면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의 표면과는 다르게 영혼의 단계에 이른 이들은 육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육체의 감정을 조정하여 평정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평화는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단계가 바로 하느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단계입니다. 성인들이 이 단계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또 예루살렘을 보면서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또 어떤 때는 유다인들을 심하게 질책하시고, 어떤 때는 성전을 뒤집어엎으며 분노를 폭발하고 폭력까지도 쓰십니다. 이 감정의 변화는 육체의 감정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룩한 분노이고 거룩한 질책이고 거룩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은 모두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심장은 썩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트 모양으로 유리 상자 안에 넣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이 불에 그슬린 자국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의 불화살로 맞은 자리입니다. 천사가 사랑의 불화살로 데레사 성녀를 찌른 이후에 그 심장은 항상 사랑에 불탔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을 가지면 원수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총망라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유다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고집으로 메시아를 믿지 않으려 했고 마태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길게 나열한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며 회개하지 않는 고집쟁이 자신의 민족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마태오의 따듯한 가슴과 눈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적인 사도들을 이성적으로 만들고 또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심장을 갖는 날까지 (물론 그 이후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주님의 섭리 안에 있는 나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예수님까지가 십사 대입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나눈 이유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여 유다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시간이 없어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이전부터 구원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죄를 지으라고 인류를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죄를 지을 것을 미리 알았기에 창조 이전부터 이미 구원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이 계획을 위해 마련되었던 분이 그리스도와 성모님인 것입니다. 모든 족보가 다 남자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오직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탄생은 요셉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탄생의 시간은 온 세상의 창조 이전과 세상 종말 이후의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야 아담과 하와부터 세상 마지막 한 명까지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창조 이전에 불림을 받았고 선택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다 이런 의미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우리에게 더 큰 복을 가져왔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 분과 한 몸을 이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성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그분의 영원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까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천사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우리들만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악을 더 큰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고 오늘 족보에서도 그런 경우를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다와 타마르에게서 페레츠가 태어났다고 나옵니다. 사실 타마르는 자신의 큰 아들의 며느리였습니다. 큰 아들이 죽자 작은 아들 오난도 타마르와 혼인하여 죽었고 그래서 유다는 타마르를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소식을 기다리다 못한 타마르는 몸을 파는 여인 모습으로 자신의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가 페레츠인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당신 구원계획을 완성하십니다.

또 이방인인 룻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이스라엘에 와서 살면서 남편의 친척인 보아즈의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를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오벳입니다. 오벳 또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니 이런 관계를 통해서도 주님은 당신 구원계획을 완성하십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라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사실 이방인이면서 다윗의 장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죄를 짓고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전 남편을 죽여 가면서까지 여자를 차지하며 낳은 아들이지만 역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하심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뛰어넘고 그것까지도 은총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는 당장 우리에게 다가오는 잘못과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도 어쩌면 주님의 섭리에 포함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오늘 도서관에서 전에 성서 공부할 때의 지도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거짓말로 논문 심사에서 낮은 점수를 맞게 하여 박사를 이어서 할 수 없게 만든 분입니다. 그리고 종합시험 때는 한국 들어가서 살아남기 바란다는 애정(?)어린 충고까지 해 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 때문에 저는 과목을 바꾸어 교의를 공부했고 더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오히려 교의를 해서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먼저 성경을 하고 교의를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은 안 좋은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저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도 저는 그 교수님께 자신 있게 인사를 하였지만 그 분은 겸연쩍은 듯이 인사를 받으셨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 되새기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웠던 일들과 후회스러운 일들, 하느님은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당신 계획을 완성하시고 우리 인생을 완성해가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악을 가지고도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주님의 섭리 안에서 크게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통하여 나를 만들어가고 계심을 깨닫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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