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 4 주일 - 맞아들임
제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갈 곳이 없는 집 없는 아이를 집 주위에서 발견하셨습니다. 옷도 더럽고 얼굴도 더러워 보이는 제 또래 남자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들어오라고 해서 밥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리고 불쌍했는지 목욕도 시켜주시고 우리 옷도 꺼내 입히셨습니다. 아이가 갈 곳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갈 곳이 생길 때까지 우리 집에서 지내라고 배려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 남자 넷, 즉 아버지, 형 둘과 나는 어머니의 이런 배려에 반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갈 곳도 없고 불쌍하니 도와주자고 하였습니다. 저희는 마지못해 그 아이를 맞아들였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학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삼형제가 열심히 모으던 돼지 저금통도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집 뒤란에 돼지저금통들이 배가 갈라져서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의 사랑에 배신으로 상처를 준 그 아이가 미웠지 오히려 마음 아픈 어머니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는 것 중 가장 소중한 한 장면입니다. 사랑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래서 커다란 모험입니다. 받아들이면서 아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부가 되니 저의 가족들에게 신자 분들이 이것저것 해 주실 때는, 가족들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받아도 되는 것이냐고 꼭 물어봅니다. 받아서 저에게 해가 되거나, 제가 주시는 분들께 매이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주고받은 것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군가 내가 주는 것을 받아주지 않으면 관계가 깊어질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을 매일 먹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이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성모님과 혼인하고 싶었지만 성모님께서 잉태하신 것을 알게 되자 파혼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천사가 그의 꿈에 나타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고 그는 성모님과 혼인하게 됩니다.
만약 요셉이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파혼을 하고 또 성모님이 잉태한 아이가 요셉의 아이가 아님이 밝혀졌다면 성모님과 예수님은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성모님도 하느님과의 관계만 중요시하여 요셉을 남편으로 맞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어도 사태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역사에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아니 세상 창조 때부터 사람의 관계 밖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요셉은 마리아와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까지 받아들이게 됩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우리 지상 교회가 천상 교회를 어떻게 맞아들여야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사실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대에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기 위해 그리스도보다 먼저 성모님의 신비를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성모님의 믿음을 간과하면 살이 되어 오시는 강생의 신비 자체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의 연장인 성체성사까지 이해할 수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체성사까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살이 되어 우리와 한 몸이 되기 위해 오시는 성체성사를 거부하기 이전에 이미 성모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사실 천주교 신자라고 하여도 요셉 성인처럼 성모님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사의 시작이요 끝인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아직도 이 강생의 신비가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 매 미사 때마다 재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셉 성인은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한 여자의 몸에 잉태되는 신비를 받아들입니다. 이 믿음이 매 미사 때마다 사제에 의해 축성되는 성체성사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요 믿음이 되어야합니다.
이제 곧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맞아들일 줄 아셨던 분은 성모님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설명하실 때,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사시고 당신이 아버지 안에 사신다고 하신 것처럼, 강생의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마리아 안에 살게 되고 마리아 또한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관계는 어떤 물질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이 신비가 이루어 진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바로 성령님께서 내려오실 때가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들의 손에 넘겨주시는 것의 계시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기에, 자신의 것을 조금 나누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온 자신을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것이고, 그렇게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사시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처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필립보에게 당신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사시는 두 분은 성령님을 통해서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당신 온 자신을 주시고, 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한 몸이 되는 신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드님이 아버지를 받아들이실 때가 세례를 받으실 때인 것은 세례가 곧 그 분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만 그 안을 아버지로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받는 것은 곧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아드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당신의 영, 즉 성령님을 맡기십니다.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것이고 아버지는 아드님의 영을 받아들이십니다. 이렇게 이번에는 아드님께서 아버지 안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실현 된 때는 육체까지도 아버지 품으로 올라가셨던 승천 때였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고 받고 하는 이 삼위일체의 신비가 먼저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안에 사시고 마리아는 당신의 승천으로 또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사시게 되었습니다.
이 신비가 이번에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교회의 모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마리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리아는 교회에 사시게 됩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마리아를 맡기고 요한이 자신의 집에 마리아를 모셨다고 할 때, 요한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마리아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도 교회 안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처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마리아도 있고 예수님도 있고 아버지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까지 내 안에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요셉이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성체의 신비 안에서 우리 안에 모든 교회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모델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 매 미사 때마다 고백되지 않으면 예수님은 수백, 수천번 태어나셔도 내 안에는 태어나실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