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날씨가 많이 춥죠?
겨울은 좀 추워야 일 년 내내 농사도 잘될 것이고...
추위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어깨가 펴질 겁니다.
삶은 곧 만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의 무대에서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선과 악이 서로 싸우고 진리와 거짓이 같이 만납니다.
신의와 배신이 있고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바로 대결의 장이 만남의 장이 아니겠는가?
성서를 보면 카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질투로 인한 살인의 만남 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인류최초의 불행한 만남이
카인과 아벨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예수님과 유다스의 만남은 배신과 뉘우침 가책의 만남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은
진리를 사랑하는 깊은 내면적인 만남이었고
아우구스티노와 암브르시오 주교와의 만남은
바로 아우구스딩을 회개시키는 회개의 만남이었지요.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의 만남은 기울어져가고
부패해가는 중세교회를 재건하는 그런 특별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단종과 성상문의 만남은 신과 의를 잇는
불멸의 충성을 빛나게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공자와 안회의 만남은 유교를 창립하게끔 했던 특별한 만남이었고
석가모니와 아난의 만남은 불교의 기본교리를 정립시키는 만남이 되었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인류의 구원 기간이었던
교회를 탄생시키는 그런 만남이었습니다.
감곡신자들과 김웅열 신부와의 만남은 과연 얼마나 행복한 만남일까?
감곡신자들을 만난 것은 내 생애의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살고 있는데
감곡신자들은 과연 어떨까?
인간이 선하게 변하는가 아니면 악하게 변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만남이었는가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성서 공부를 하는 자매님들의 만남은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남을 흉볼 수는 없기 때문에 선하게 변화가 됩니다.
돈으로 연결된 계모임의 만남은 자칫 잘못하면 시기와 질투 허세 때문에
인간적인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내적평화와 기쁨과는 거리가 멉니다.
시집가기 전에 착했던 자매가 남편을 잘못만나서 성질을 버리고 이상한 여자로 변합니다.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내가 누구를 만났느냐는 것으로 그날 하루의 행복과 불행이 갈려집니다.
오늘 성모님께 초대받아온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기쁘고 행복할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의 만남은 성령의 만남이었고
여자끼리의 만남가운데 이토록 아름답고 흥분된 만남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세례자 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에서
두 여인이 태중에 아기들을 가진 채로 위대한 만남을 갖습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묵상거리를 제공해줍니다.
첫 번째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거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거룩했기 때문입니다.
만남의 질은 언어의 내용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깡패들은 만남에서 첫마디가 욕으로 시작하고 욕으로 끝납니다.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 가만히 들어보면 욕으로 시작하고
욕으로 끝나는 그런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자주 말에 대해서 회개해야합니다.
그 만남이 성공으로 가느냐, 아니냐는 말의 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천지차이로 바뀝니다.
올 한해 내가 만났던 형제자매들과의 대화에서 거짓말 상처 주었던 말들
책임질 수 없었던 말들, 남에 대하여 함부로 했던 말들..... 우리는 묵상해야합니다.
어떤 만남이든지 만남은 신비스럽고 귀한 것이지만 나중에는
경솔하고 악한 말들 때문에 악하고 추하고 냄새나는 만남으로 변질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만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입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그렇게 기분 좋았던 하루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합니다.
말을 툭 던져놓고도 던진 사람은 기억조차 안 납니다.
상처받은 사람만 피를 흘립니다.
올 일 년 동안 여러분들이 뿌려놨던 말의 씨앗이
지금 어떻게 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절망 중에 있었던 사람이 내입에서 나오는 축복의 말을 듣고
아름답게 살려고 한다면 그 입은 축복의 입이었지만
올 일 년 내내 내 입에서 나왔던 독살스런 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고 살고 있다면
그 입은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고백성사 한번 보고 “말로 죄를 졌습니다.”
하는 것으로 상대편의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냐?
그건 아닐 겁니다. 많은 보속을 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나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생각이 나면 구체적으로 용서를 청해야합니다.
자기 혼자 들어가서 성사만 보고나오면 그게 끝이 아닙니다.
이 두 여인의 만남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엘리사벳은
나이가 마리아보다 훨씬 위였지만 마리아에게 찬사를 드립니다.
그 이유는 나이가 한참 아래인 마리아가 존경스럽다는 것보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존경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움직이는 감실이고
걸어 다니는 감실인 우리들은 당연히 존경을 받아야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내 가족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겁니다.
성체를 미사 때마다 넙죽넙죽 받아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으로 변한 사람은 예수님 냄새가 나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도 ‘저 사람은 참 다르다. 요즘에도 저런 사람이 다 있네.
참 저 사람은 본받을 것이 많아.’ 라는 얘기를 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거룩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성체를 모시고 있는 우리들도 성체 안에 계심을 믿고
내가 예수님으로 변했음을 믿을 때는 존경을 받습니다.
주일미사만 지키고 성체만 영하면 뭐합니까?
동네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아이구 저 인간이 꼬박꼬박 성당은 기어나가네.’
갔다 오면 뭐해? 삶이 변화가 있어야지요.
성당 갔다 와서 성질 더 부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볼 때
‘돌아다니면서 말로써 동네를 분란을 일으키는 게 천주교 신자더라.’
누가 그 사람을 보고 존경하겠습니까?
세 번째로 두 여인의 만남이 위대한 만남이라는 것은 엘리사벳의 겸손입니다.
나이로 보나 족보로 보나 딸 같은 여동생이었지만 예의를 갖췄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도 없다고
겸손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이 겸손하니 그 아들 세례자 요한도 겸손했습니다.
그 아들 세례자 요한도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태교는 자식에게 중요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 태어나는 아이는 대개는 난폭합니다.
요즘은 인성 속에 있는 그 무의식 속에 있는 상처를 엄마뱃속에서
받은 상처부터 치유해야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열 달 동안 엄마가 나를 배고 호시탐탐 죽일 기회만 노렸다면
그 아이가 손톱만 하다 하더라도 영혼마저 손톱만 한 것은 아닙니다.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아이의 영혼은 완전하기 때문에
내가 축복의 존재로 잉태된 것인지 아니면 암보다도 더 더러운 존재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지 태아는 압니다.
이렇게 열 달 동안 죽음의 공포로 살다가 세상에 나온 아이들은 과잉방어를 합니다.
이유 없이 부모를 미워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신이 싫다고 합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태아 때입니다.
열 달 동안 엄마가 자기를 배고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바람난 남편을
저주하면서 살았을 때, 미움을 열 달 동안 먹고 자란 아이는 대부분 폭력이 강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상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처만 치유시켜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닙니다.
내가 이 아이를 뱃속에 배고 열 달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주었다면
하느님께 용서청하고 그 아이의 상처를 치유시키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교만한 부모 밑에서는 교만한 자식이 나옵니다.
욕심 많은 부모 밑에서는 탐욕스런 자식이 나오고
미움을 가졌던 부모 밑에서는 그 자식도 많은 상처를 가지고 나옵니다.
뱃속에 있을 때 엄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은 자식들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성호를 긋고 나옵니다.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열 달 욕하는 소리만 듣고 욕만 배우고 세상에 나온 자식은
뱃속에서부터 나오자마자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역사에 남을 인물 하나를 만들려면 삼대에 걸쳐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집안에서 성인이 나오려면 적어도 여섯 대에 거쳐서 조상들이 많은
기도를 드려야 그 집안에서 성인이 나온다고 합니다.
성인 성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두 여인의 만남처럼 우리 신자들도 어느 만남이든지 입을 조심합시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느끼면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예수님을 보고 존경하게끔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느 만남이든지 우리는 겸손해야합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늘 자식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라는 말을 좋은 뜻으로 들어야지~ 나쁜 뜻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위대한 만남처럼 매일매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함부로 하기 쉽고 소홀하기 쉬운 가족들과의 만남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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