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간 수요일 - 노력하라
어렸을 때부터 행복하기를 바랐고 그래서 늦게나마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불만만 늘어가고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말했지만, 며칠 굶어보기로 했습니다. 남들은 일주일씩도 단식하던데 저는 이틀 안 먹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성체를 영하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해 있었나 반성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는데 마땅한 행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준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는데 뭐 대단한 일이나 해드리는 것처럼 잔뜩 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는데 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식사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밥알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 하나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겸손함으로 살면 신학교 삶도 행복하리라 느꼈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노래하시지 않습니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찬미는 감사드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께 기뻐 뛰며 감사하는 이유는 바로 성모님께서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의 겸손이 바로 하느님께 감사하게 하고 기뻐 뛰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고 우울해지는 것은 반대로 교만 때문이겠지요.
저는 겸손이 바로 행복의 비밀임을 깨닫고 이제 낮추고 사랑하기만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습니다. 그런 감격은 며칠 내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기쁘지 않았고 다시 미사와 기도가 찬미가 아니라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겸손해지기 위해서 성인들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많은 유명한 영성서적을 읽었지만 겸손 하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성의 두 대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책을 모조리 읽기로 하고 제 기억엔 다 읽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영성에 왕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면 영성이 증가한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굶으니 겸손해진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계속 육체를 죽이다시피 하며 사는 것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도 끊임없이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지만 결론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에 “노력하라.”라고 합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성탄 축제를 하였습니다. 각국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신학생들이 장기를 뽐내며 공연을 하였습니다. 여기 살며 처음 참석해 보았지만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각 대륙의 사람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노래하는 것을 보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각자는 노래를 잘 하겠지만 화음을 맞추는 것은 또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쁜 와중에서도 일주일에 한 시간씩 꾸준히 노래연습을 함께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꾸준한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화음을 낼 수 있었을까요?
아오스딩 성인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습관이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덕이 겸손이라면 겸손해서 기쁘고 감사한 것은 알겠지만 그 덕을 갖기 위해서는 습관처럼 겸손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된 노력이 결국은 몸에 베이고 그것이 덕이 되는 것이지 한 순간의 결심에 의해 겸손이나 사랑, 인내, 친절 등의 덕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미사를 드릴 때나, 또 성무일도를 할 때, 시작 전에 정말 감사와 찬미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무로 그냥 하는지 항상 제 자신에게 물어보고 나쁜 일이 있었더라도 억지로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합니다.
삶에서도 단점이 있으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시도하고 또 시도해서 하나라도 고쳐나가려고 합니다. 1년에 자신의 단점 하나씩만 고쳐도 모두 성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노력하지 않으면 살면서 자신의 단점 하나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영성은 다름 아닌 ‘노력’에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데살 5,16-18)
즉, 하느님의 뜻은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하며 나의 일부로 만들어갑시다.
감사는 받아들임의 증거
크로스비라는 여자는 식모의 불찰로 어려서부터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자라 나중에는 9,000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쓰게 됩니다. 그는 아홉 살 때 하느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만약에 하느님이 나에게 시력을 다시 주신다 해도 저는 받지 않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 또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한없이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독일의 한 암 병원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설암으로 혀를 절단해야 할 때 마취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만약 나라면 마지막 말로 무슨 말을 할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암 환자는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에게 진정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잘 깨닫게 됩니다. 제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황당한 말이, “감사는 하는데, 줄 마음은 없어요.”입니다. 즉, 받은 것들에 대해 감사는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분은 참다운 감사는 사랑과 같은 말임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감사란 그 주는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는 ‘사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서 감사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것이 없는데 그것보다 더 받는다는 것은 양심적으로도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은 더 주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려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발을 닦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의 그릇이 그 사랑을 받기에 너무도 작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발을 닦아주지 않으면 베드로와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닦는 것을 허락합니다. 발을 닦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감사하고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을 때 당연히 우리 안에서 솟아 나와야 하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와 찬송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라고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이는 이미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저절로 나오는 찬송입니다. 당신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단 한 가지,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감사가 곧, Eucaristia, 즉 ‘미사’입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처럼 성체를 받아들이고 감사를 올립니다. 그러니 참다운 감사의 찬송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성체를 모셔도 아직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받아들였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 때 온 영혼을 다해 주님을 찬송합시다. 그것이 아니라면 영혼의 구원과 하느님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에게서 다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성모님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요셉과 엘리사벳의 마음도 모두 기쁨으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그 응답이었습니다. 카인처럼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땅에 형제의 피를 뿌리는 살인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벨처럼 성모님처럼 받은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 감사요 찬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위해 파라오에게 알린 목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 중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3일 거리의 광야로 나가 하느님께 찬미의 제물을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지금 찬미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하느님나라는 멀고도 먼 다다를 수 없는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남자에게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잔소리만 하는 아내를 좀 데려가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은 그 남자의 아내를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문상 오는 사람들이 저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을 빨리 데려갔다고 매우 슬퍼합니다. 이것을 본 남편은 자신 아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음을 다시 깨닫고 두 번째 소원으로 아내를 다시 살려달라고 합니다. 역시 다시 살아난 아내는 또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한 소원이 남았는데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지막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청했고 아내와 사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 단 한 가지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어도 불평만 하게 됩니다.
관계는 주고받는 것에서 형성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영혼으로 Manificat을 노래할 수 없다면 나는 아직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말로만 주님, 주님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사와 성체가 ‘감사’란 말뜻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마니피캇 그레고리오 성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