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Lk.1.59-60)
제1독서 말라키 3,1-4.23-24
복음 루카 1,57-66
그저께 저녁 외출할 일이 있어서 자동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더니만 시동이 전혀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서는 라디오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작동도 되지 않습니다. 배터리 방전도 생각했으나 배터리 바꾼 지가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이 기억났습니다.
아무튼 바빠서 보험회사에 연락도 하지 못하고 약속 장소로 다른 분의 차를 타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동 켜지지 않는 차에 대해서 말하는데 하나같이 차가 오래되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낡은 차는 고치는 값만 많이 나가지 또 금방 고장이 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제는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십니다.
걱정이 생겼습니다. 차 가격이 일이십만 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빚내서 차를 구입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저께 저녁부터 어제 아침까지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차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 중고차로 거의 마음을 결정했지요.
중고차를 새로 구입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차가 굴러거야 팔 수 있을 것 같아서 보험회사에 연락을 해서 정비를 부탁했습니다. 10분도 되지 않아 정비기사님께서 오셨고, 제 차의 내부를 먼저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변속레버가 중립에 있네요. 그래서 시동이 걸리지 않은 것입니다. P(Parking)에 놓고서 시동을 걸어보세요.”
단 번에 시동이 걸리더군요. 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변속레버를 잘못 놓았기 때문에 생긴 운전자 부주의의 결과였던 것이었지요. 아침 일찍부터 오신 정비기사님께 죄송했고, 아울러 그동안 무식한 저를 힘껏 도와 준 제 차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렇게 나의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즉,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보고 판단했으면 잘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성급하게 판단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은 상처와 아픔을 주었던 적이 많았음을 반성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대해 나옵니다. 탄생 이후 할례식에서 이름을 짓는 명명식 역시 거행되는데,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했지요. 그러나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그렇게 불러야만 했던 것이지요.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인정했기에, 의심을 품어 굳어진 혀가 그때서야 풀려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제대로 된 판단을 해야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 안에서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를 늘 보살피고 계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참 행복 속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위대함을 흉내 내지 마라.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져라.(S.콜리)
구두도 즐겁겠구려(권영상, ‘뒤에 서는 기쁨’ 중에서)
서부역 앞, 느티나무 교목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교목들이 흔들리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저쯤 낮은 벽 아래 구두를 닦는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역사 앞 푸른 바람을 즐기며 쉬지 않고 솔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분에게 구두를 맡기고 싶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맡기고 노인이 권하는 의장에 앉았다. 노인은 내 구두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세상을 즐겁게 사시는구려.” 그랬다. 멈칫 놀라는 내게 다시 “신발 뒤축이 많이 닳았다는 뜻이유.” 그러며 짧게 웃었다.
“이 일을 얼마나 하셨지요?” 노인은 40년을 넘게 했단다. 순간 놀랐다. 남의 구두나 닦는 일에 생애를 따분하게 바칠 수 있다니! 그런 나의 속내를 느꼈는지 노인은 낡은 나무통에서 신문 한 조각을 꺼내 보였다. 그 노인을 취재한 ‘인생 40년 구두 닦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였다.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노인이 다 닦은 구두를 내 앞에 쓱 내놓았다.
“즐겁게 사시니 신발도 즐겁겠구려.”
속으로 ‘인사치레겠지.’하고 노인 곁을 떠났다.
전철에 올라탈 때쯤이었다. 그때서야 그분이 넌지시 해 준 말뜻을 알 것 같았다. 인생을 즐겁게 살라는, 나에 대한 은근한 충고였음을. 구두를 닦으며 예순을 넘게 살아온 그분이 어찌 나의 사람됨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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