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4 주간 금요일 - 나와 모든 것의 관계
저의 어머니는 제가 잉태될 때 태몽을 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뱀이 집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들으니 그 꿈은 주위에 사람이 많을 팔자라고 했습니다. 사제가 팔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습지만 정말 제 주위엔 사람이 많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태몽을 어머니만 꾸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꾸어주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태몽을 대신 꾸어 혹시 임신하지 않았느냐고 연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감은 맞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쩌면 그냥 스쳐지나갈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육체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있지만 영적으로는 보이지 않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는 자신의 아들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예언을 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기의 일생을 예언합니다. 왜 본인의 일생을 본인에게 예언하게 하지 않고 아버지의 입을 통해 예언하게 하셨을까요? 사람은 서로 영적으로도 관계 맺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자그마한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먹이와 공간은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한 물고기는 다른 물고기가 없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더 넓은 공간에서 많은 먹이를 먹으며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물고기의 바람대로 다른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다른 물고기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죽은 물고기 때문에 작은 연못이 썩어가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 물고기도 결국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사람은 나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무관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와 완전히 무관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과 미세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끼리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땅도 함께 저주를 하십니다. 사람과 자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 땅이 죄를 짓는 인간들을 토해낼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너희는 이런 행위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저질러 부정을 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 낼 민족들은 이런 온갖 행위로 부정을 탄 것들이다. 그 땅도 부정을 탔기 때문에, 나는 그 죄악을 벌할 것이다. 그 땅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토해 내리라.” (레위 18,24-25)
따라서 급격히 많이 일어나는 세상의 자연재해들도 인간의 죄가 늘어감 때문은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내가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며 산다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자연까지도 그것을 기뻐한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됩니다.
한 아담의 죄로 온 인류와 자연이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또 다른 아담의 보속으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제 2의 그리스도가 되어 산다면 나는 물론이요 온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 사람의 경사는 그 가족 모두의 경사입니다. 한 사람이 결혼하지만 그 기쁨은 온 가족과 친지, 친구들까지 번져나갑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소화 데레사가 선교를 지향해 리지외라는 작은 시골 봉쇄 수도원에서 바쳤던 희생은 전 세계의 그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 하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모님은 오래전 시골의 가난한 한 여인이었지만 그 분의 ‘예!’라는 한 마디가 온 세상에 구원이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 분의 거룩함으로 온 세상이 구원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이 세상이 거룩해지는 것이고 내가 회개하는 것이 세상이 회개하는 것이며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사제가 되고 유학을 다시 나와서 교구 차를 운전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면허증 교환에 어려움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국제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해야 했습니다. 제가 처음 체류증을 신청할 때 출생지를 면허증과 다르게 기재해서 새로운 체류증이 나올 때까지 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태리는 우리나라와 운전면허증 자유교환이 체결된 상태라 국제운전면허증으로도 운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체류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국제운전면허증으로 운전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경찰들이 잡아도 여행객인 행세를 하며 국제운전면허증을 보여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혹시 사고라도 나서 깊이 조사가 이루어지면 곤란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면허증을 교환하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운전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부득이하게 운전을 해야 했을 때는 운전을 하는 내내 매우 불안했습니다. 경찰들만 보여도 긴장되고, 불시 검문에라도 걸리는 때면 가슴이 사정없이 콩닥거렸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서 있을 만한 곳은 일부러 피해서 가지 않고 멀리 돌아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새 체류증이 나오고 면허증 교환신청을 하고 임시 면허증을 받으니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습니다. 그것을 받은 며칠 후에 사고가 났습니다. 뒤에서 택시가 저희 차를 박은 것이었습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가 외국인이라 다쳤냐는 말도 안 하고 자기 차 부서진 것만 열심히 살폈습니다. 저는 그 택시 운전자에게 가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경찰 부릅시다.”
그동안 딴청만 피고 있던 택시 운전자는 그냥 자기가 100% 다 물어줄 테니까 경찰은 부르지 말자고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택시는 그 전날이 차량검사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찰이 오면 당연히 그것이 발각될 것이고 훨씬 많은 돈을 물어야 할 것이기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반대로 저는 임시 면허증이지만 법에 어긋나는 것이 없으니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면허증이 있으니 사고가 나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다윗은 온 세상이 평안해지자 계약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때 예언자 나탄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왕직을 부여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니 우리도 그분의 자녀로서 천상 왕직을 누리는 것입니다. 왕은 무엇을 하는데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왕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불안하다면 아직은 왕직을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두려울 것이 없어야 왕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왕이 못 되는 이유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약의 궤만 함께 있으면 아무 두려움이 없었고 감히 어떤 적도 이스라엘과 맞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교만해 질 때는 계약의 궤를 빼앗기기도 하고 그것을 모셔두었던 성전도 불타고 허물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계약의 궤를 운전면허증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만, 그것이 나와 함께 있고 없고에서 느끼는 평화와 불안함은 서로 비슷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터키의 아라랏 산에 있고 탐험가들이 그것을 발견해 안에까지 들어가서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뜬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계약의 궤는 에티오피아에 있다고 전해집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가장 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누구의 식민지배도 받아보지 않은 독립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그리로 건너온 계약의 궤가 적의 침입을 물리치게 하고 그 나라에 평화를 유지시켜주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성전은 우리 마음이고 우리 마음에 계약의 궤가 들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화롭고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즈카리야도 계약의 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평화를 준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분은 힘센 왕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서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어 우리가 마음 편하게 주님을 찬미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즈카리야의 노래를 반복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 누군가 널 위하여 기도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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