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을 향하여" - 12.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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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0-12-23 | 조회수365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23 대림 제4주간 목요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하느님을 향하여"
오늘 말씀 묵상과 관련되어 마음에 와 닿은 다음 시편 구절입니다.
“당신을 향하여 두 손을 펴들고, 내 영혼 마른 땅처럼 당신을 그리나이다.”
“어디로 가야할 길, 나에게 알려주소서. 내 영혼 당신을 향하여 있나이다.”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잡아져 있는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이 방향을 잊어 버렸을 때 무기력, 무의욕, 무절제의 혼란하고 복잡한 삶이요 건강도 잃습니다. 다 다른 우리가 일치를 이루어 살 수 있는 것도 다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안에 그 고유의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정주하여 충실할 때 사람들은 거기에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심을 알아챕니다.
하느님 안 그 고유의 자리를 상징하는 게 바로 ‘이름’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런 진리를 분명히 합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자 사람들이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리야로 부르려하자 단호히 제동을 거는 엘리사벳입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느님께 영감 받은 엘리사벳임이 분명합니다. 즈카리야 역시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니 모두 놀라워합니다. 요한으로 명명되는 순간 즈카리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하느님 주신 고유의 이름에 고유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코드에 맞는, 하느님 의중에 맞는 요한이라는 명명되는 순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리야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다.’라는 요한 이름 뜻입니다. 하느님과 코드가 맞는 삶일 때 저절로 입은 열려 기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미할 때 저절로 하느님의 코드에 맞는 삶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코드를 맞추는데 하느님 찬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 찬미할 때 하느님을 향하여 활짝 열리는 귀요 눈이요 입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이 즈카리야 부부를 통해 실현됩니다. 주님의 길을 닦으며 제자리에 충실했던 요한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새삼 모두가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똑 같습니다. 우연히 여기 와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의 손길이 오늘 여기 있게 했습니다. 그러니 ‘만일…했었더라면’ 하며 과거를 생각하고 후회하는 것 참 부질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당신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었고 당신의 뜻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향할 때 하느님 안에서 고유의 제자리를 깨닫게 되며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바로 이 고유의 제자리를 상징하는 나의 이름(세례명)입니다. 그러니 서로 자리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다 하느님을 향한 삶이지만 예수님의 길이 다르고 세례자 요한의 길이 다르며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하느님 안 제자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정주의 삶에 충실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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