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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인과 소비생활
작성자심경섭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4 조회수365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람마다 경제관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관이란 '개인의 재화(동산, 부동산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물질적 이익들)에 대한 벌이 및 씀씀이를 어떤 원칙이나 기준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결국, 소득과 분배에 대한 개인적 영역의 기준이겠죠. 우선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의 경우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경제생활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 필요한 만큼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2장 44절부터 45절의 이야기입니다. 사유제산제가 아닌 공동소유제를, 획일적 분배가 아닌 합리적 분배를 경제생활의 원칙으로 하고있습니다. 그리스도인(예수믿는 사람들)이란 예수를 통한 구원(죄의 용서와 부활을 통한 영생을 말한다)을 믿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통칭합니다. 성서에 비춰진 예수는 급진주의자였습니다. 당시 가장 천한 사람들, 예를 들어 창녀와 과부 또는 수산업 노동자(제자들)와 세금포탈자(세리) 심지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재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급진적인 행동이었죠. 예수의 경제생활은 언제나 나눔이었습니다. 빵 다섯개와 생선 두마리로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였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그것이 실제로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해서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대중들의 자발적인 나눔의 행위였던간에 그리스도인의 나눔 경제관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수의 모델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경제관에 있어서 나눔주의자여야 한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죠. 구체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비교차액의 원리(자동차의 예)

 과연 예수가 이시대에 활동했다면 자동차를 소유했을까요? 예수가 만일 자동차를 구매한다면 이런 기준이 작동했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는 수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에서 꽤나 인기있는 단체의 장이었습니다다. 그의 기적과 능력의 소문을 듣고 추종하는 사람이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고 실제로 제자들을 중심으로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조직은 돈을 관리했죠. 현대의 상황에 비교해 보면 잘 나가는 사회단체의 대표인데 자동차가 필요했다면 과연 차량을 구매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의 경우 대형차를 타고다닐 만한 사회적 지위(사회단체 대표, 스승, 랍비)에 있었지만, 마티즈나 프라이드 디젤급의 자동차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의 단체가 대형차를 타고다닐 유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해도 소형차 디젤급을 선택했을 경우 연비와 유지비의 차액이 대충 따져도 몇 십만원이나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분명히 그 차액을 고스란히 이웃과 나누었을 것입니다. 비교차액의 원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의 하위단계의 것을 선택함으로써 그 차액을 어떤 방식으로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구매행위에 해당합니다.


둘째, 부당이익 환원의 원리(부동산의 예)

 여기서 부동산으로 이익을 창출한 경우란 최근 몇년간 비정상적인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이익을 챙긴 투기세력 및 비투기세력 모두의 경우를 통칭합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이유는 개발독재시절부터 계속되어온 건설기업들의 정경유착과 로비, 강남과 분당 판교등의 신도시 신드롬등 투기세력들의

 시세차액을 노린 부동산 투기문화, 그에 편승한 대중들의 아파트 기득권세력 만들기가 주원이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가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가 위의 여러가지 이유로 껑충뛰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검은 이익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성실히 일한 노동의 댓가가 아닌 투기세력이 올려놓은 부동산 가격등의 부당이익으로 땀흘려 일하며 정직하게 살아온 다수의 서민들이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지는 상황이라면 예수는 이 상황을 변화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 변화는 다름아닌 부당한 이익만큼의 재화를 이웃에게 환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당이익 환원의 원리는 자신이 직접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았더라도 간접적인 이익을 얻었을 경우 그 이익만큼의 재화를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달렸습니다.


셋째, 공동체 지향의 원리(대형마트의 예)

 어느 신문기사를 보니 대형마트 하나가 들어서면 동네슈퍼와 소형노점골목 등 재래상권이 10곳에서 많게는 20곳정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재래시장이나 소형노점골목은 하나의 커뮤니티입니다.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장을 보러 나간 시장에서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아이구~ 누구엄마 오랫만이네!", "고등어 한 손에 2천원이면 거저야~", "아줌마, 담에 올때 200원 더 드릴께요.." 시장에가면 정겨운 대화가 있었고 시시콜콜한 동네의 소식들을 들을 수 있었으며 덤으로 돌아오는 달달한 간식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재래시장은 동네의 커뮤니티였고 사람냄새나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사는 중계동에만 대형마트가 세 곳이나 되니 어림잡아도 동네슈퍼나 재래시장이 30곳이나 문을 닫아야 했을 것입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니 삶이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편리함의 댓가로 지불해야 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가난한 상인들과의 나눔, 이웃간의 정 나눔입니다. 아니, 하나가 더있습니다. 대형유통구조의 희생양인 농민들과 어부들이죠. 대형마트에 가보면 유난히 야채와 과일 수산물이 비쌉니다. 이유는 간단하더군요. 산지에서 헐값에 대량으로 구매한 먹거리들을 물류비, 유통마진 등으로 가격을 부풀리다 보면 재래시장의 1.5내지 2배정도의 값으로 판매가 될 수 밖에요.. 소비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감자나 버섯등을 한봉지 덤으로 주거나(일명1+1) 몇가지 상품을 재래시장 수준의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산지의 농산물은 점점 헐값으로 팔려 농민들은 삶이 팍팍해지고 대형마트의 유통마진은 높아집니다. 결국, 대형마트는 가난한 상인들과 이웃간의 나눔을 차단하고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동체 지향의 원리는 나눔을 최대화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원리입니다. 과연, 예수라면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중 어느 곳에서 장을 보았을까요?

 


ps.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천민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은 수의 주류 개신교 목회자들과 대형교회의 신자들은 제가 보기엔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부분의 신부님들이나 신자들 또한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에 대하여 신앙생활의 비본질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은 듯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을 경제생활이라는 활동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신부님들이 큰 차를 몰고다니고 신자들이 이마트, 롯데마트 등 반노동기업의 대형마트를 아무 생각없이 이용하는 행위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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