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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유에 누워 오신 예수님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5 조회수368 추천수3 반대(0) 신고
 
 

구유에 누워 오신 예수님 - 윤경재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루카 2,12)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삼삼오오 손을 잡고 모였습니다. 성당에서, 가정에서, 길거리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캐럴이 울려 퍼집니다. 성탄의 놀라운 신비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천여 년 전에, 지구 상 외딴 곳 베들레헴 땅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온 인류가 그리스도라고 축하하는 오늘의 모습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날 겨우 몇몇 목동이 찾았던 초라한 마구간이 이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놀라운 신비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강생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여전히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날만큼은 잠시나마 미움과 증오를 삭입니다. 전쟁 중이라도 이날만큼은 잠시 여유를 갖고 평화의 길을 찾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도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보는 것이 표징”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오해 없이 제대로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볼 뿐 저 하늘 위에서 세상을 밝히는 달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아기 예수께서 말구유에 누워 탄생하셨는지, 또 바로 그 모습이 표징이라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잇감을 담아두는 그릇입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정성껏 여물을 쑤어 자기가 돌보는 짐승들을 먹입니다. 농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여물을 구유에 담을 때 그 짐승은 구유에 든 여물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사랑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주인이 정성으로 기른 짐승들은 사랑이 담긴 여물을 먹고서 주인을 위해 힘껏 일합니다. 소이든 말이든 양이든 자신을 돌보아주는 주인에게 기꺼이 봉사합니다. 

이것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짐승이 서로 사랑으로 관계 맺는 것입니다. 짐승들은 그저 이 세상에 어쩌다가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를 실천하러 나왔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본능을 아무 의심 없이 실천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다른 생각을 떠올립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제 손으로 먹잇감을 마련하겠다고 합니다. 단순히 먹이고 받아먹는 관계가 너무나 심심하다고 여깁니다. 그런 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러고 나서 사랑이 담긴 구유를 외면한 채 다른 것을 찾습니다. 혹시나 하고 다른 곳에서 먹잇감을 찾아보지만, 밖에서 아무리 헤매도 얻어지는 것은 헛수고뿐입니다. 참 사랑이 나오는 곳을 잊어버렸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상태를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1,11)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1-55) 

또 다른 짐승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먹잇감으로 오시어 구유에 담기신 아기 예수님을 받아먹으려 하지 않았다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돌보는 짐승에게 필요한 먹이는 여물이지만,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인간에게 필요한 먹잇감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알아듣기 거북하고 놀라운 진리를 가리켜 보이려고 굳이 아기 예수님을 말구유에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표징을 알아들으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먹이시러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기르시는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49편에서는 인간을 멸망하는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13.21) 

멸망하는 짐승이 된 까닭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먹잇감을 먹고 마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을 우리의 양식으로 받아먹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분명히 당신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수제자 베드로는 어렴풋하게나마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라는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먹잇감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생명의 말씀을 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며 살아온 자는 예수님처럼 제 몸을 이웃에게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또 다른 짐승들의 구유에 자신의 몸을 눕힐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의 현세적 기쁨에 싸여 표징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각 성당 제대 앞에 꾸며 놓은 마구간의 광경을 그저 장식물로만 여기고 머리 숙여 절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구유 속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표징을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죽어야만 하는 짐승인 우리가 진정 살아나는 길은 바로 구유에 누워 먹잇감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참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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