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대축일 - 관계와 질서
아주 막나가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목욕탕에 가서 “아이고 시원하다. 너도 들어와 봐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는 들어갔다가 시원하기는커녕 매우 뜨거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네.”라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엄청 맞았던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호빵을 사서 아이에게 하나 주고 자신은 두 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배부르지?”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솔직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 먹어서 배부르면 두 개 먹은 놈은 배 터지겠네.”
그래서 또 맞았습니다. 맞으면서 아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래 때려라, 니 아들 니가 패겠다는데 누가 뭐래... 뭐 니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
한 번은 아빠와 엄마가 싸웠습니다. 엄마가 항상 아빠에게 지지 않으려고 대들었기 때문에 아빠도 격해져서 아내를 때리려 하였고 아내는 욕을 해가며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빠는 문에 서 있던 아들에게, “그년 어디로 갔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그년 저리로 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완전 콩가루 집안이죠? 이 집안에 무엇이 없어 보입니까? 바로 ‘질서’입니다. 엄마를 ‘그년’이라고 하는 아들은 동시에 아버지를 욕하는 것입니다. 또 아들은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아빠에게 막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질서로 이루어졌기에, 질서가 무너지면 사랑도 무너집니다. 질서가 없는 부부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질서 상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를 거스르고 하느님과 같아지려하고 불순종합니다.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 된 사람은 주님께 순종하듯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요, 구원자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에페 5, 22-23)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부부싸움은 머리가 둘이 되려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높아져 머리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둘인가 하나인가를 규명해야 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막대기로 한쪽 머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맞은쪽의 머리가 “아야”하고 얼굴을 찡그렸는데 다른 쪽 머리는 히죽 웃었습니다. 이때 랍비는 “이 아이는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머리가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머리면 하나는 몸이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아마도 ‘왜 여자가 머리가 되고 남자가 몸이 되면 안 되느냐?’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는 것이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결정하시는 것처럼, 이미 남자와 여자로 태어났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왜 나만 고통 받고 십자가에 달려야 하죠? 우린 같은 하느님인데? 내가 아버지 할 테니 당신이 내 말에 순종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쇼.’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바꾸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머리가 몸을 짓누르며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도 몸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없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왜 요셉의 꿈에 나타났는지 잘 묵상해야합니다. 요셉의 아들은 하느님이니 당연히 요셉보다 높고, 성모님도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니 요셉보다 앞섭니다. 그러나 가정을 이끄는 가장은 어쨌거나 요셉인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다시 나타나 해야 할 일을 일러줄 때까지 그 곳에 머무르라고 합니다.
사실 천사를 꿈에서가 아닌 직접 더 먼저 만났던 분이 마리아이십니다. 마리아는 왜 천사가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고 요셉에게 나타나는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야 믿고 따라나서지만 몇 년씩이나 외국 땅에서 살면서 천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때 요셉이 정말 올바른 꿈을 꾼 것인지 의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고 요셉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으로 요셉을 세우셨다면 요셉을 통해 가족을 이끄실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으셨을 때도 성모님의 질서의식은 철저하셨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에서 갈릴레아로 내려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특별히 남자들이 가는 길이 있고 여성들이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성인식을 하지 않은 아이는 일반적으로 엄마와 함께 길을 가지만, 일단 성인식을 하면 정식적인 남자로 인정받아 아버지와 함께 내려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 요셉의 책임이 더 큽니다.
성모님은 3일 동안 예수님을 찾아 헤매면서 요셉에게 원망의 시선을 던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보고, “‘나’와 네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라고 나무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라고 요셉을 항상 당신 앞에 놓습니다. 이것이 순서고 질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함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시며 육체의 부모 위에 영혼의 부모인 하느님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즉, 하느님의 뜻과 부모의 뜻이 서로 반하게 될 때에는 더 높으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 위에는 엄마가 있고 엄마 위에는 아빠가, 아빠 위에는 예수님이, 예수님 위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 질서 때문에 한 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혹은 성모님이 요셉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아기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했습니다. 빛과 어둠을 나누고, 하늘과 땅을 나누고, 땅과 바다를 나누고, 낮과 밤을 나누고 또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남, 여를 동시에 창조하시지 않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게 하셨습니다. 질서가 없어지면 서로 싸워 ‘혼동’된 상태가 벌어지지만 질서는 뒤죽박죽 된 ‘혼동’을 넘어서서 ‘하나’를 이루게 만들어줍니다.
미국 아마즈나 사막을 가로질러 가노라면 햇볕 뜨거운 사막 중간쯤에 좁은 길이 있는데, 그 길옆에서 물 펌프를 발견하게 됩니다. 행인들은 목이 타서 반가움에 펌프의 손잡이를 잡고 물을 푸려고 합니다. 바로 그 펌프의 손잡이에는 깡통이 하나 매달려 있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펌프에 물을 붓고 펌프질만 하면 물이 틀림없이 나옵니다. 이 땅 밑의 샘에는 언제나 물이 흐릅니다. 펌프 옆의 바위 곁을 파헤치면 큰 병에 물이 담겨져 있는 데 그 물을 펌프에 다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은 얼마든지 필요한대로 충분히 나옵니다. 그리고 펌프질을 끝내고 물을 마신 후에는 병에 물을 가득 채워서 마개로 꼭 막고 처음 있던 그대로 모래 속에 묻어 두십시오. 다음 오는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 추신 : 목이 마르다고 하여 병의 물을 먼저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당신의 목은 잠시 축일 수 있어도 뒤에 오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내가 먼저 병에 든 물을 마셔버리면 그 우물에선 목마른 사람들이 영원히 물을 뽑아 낼 수 없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순서와 질서를 어기면 사랑의 샘물은 말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