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며 드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축일이 왜 성탄 주간에 있을까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과 관련된 복음이 많이 있는데
성탄시기에 하필이면 부활시기에나 읽을 법한
오늘의 요한복음을 읽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아마 요한이
사랑의 사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탄생을
역설한 사도가 요한이기에
말씀이 탄생하신 성탄시기에 그의 축일을 지내고,
주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한 요한에 대해
가장 잘 나타내주는 복음이 오늘의 복음이기에
비록 부활시기의 복음이지만
그의 축일에 읽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도 요한은 사랑 박사입니다.
자신이 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니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에 받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어도
요한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요한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지만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아무 사랑이나 사랑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싫어한다고 하는데도 사랑하면
그것은 짝사랑을 넘어서
스토커의 끔찍한 집착이 될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사랑을 사랑한 사람이고
특히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 박사인 요한에게서
사랑을 받는 또 다른 비결을 봅니다.
사랑을 사랑하지만 사랑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해야지 집착하는 순간 사랑은 변질되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추악해집니다.
사랑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자유입니다.
그의 사랑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야 함은 물론이고
나의 사랑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점점 자라고 자라
무척 사랑하게 되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나에게 묶어 두려 하고 독점하려 들고
나도 그에게서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되기 쉬운데
이때부터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영적인 사랑,
초월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고 구속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은
하느님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자신이 쓴 복음에서
자기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표현했을 때
예수님께서 요한만 편애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님께서 요한을 다른 제자보다 더 사랑했다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어도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독점적 사랑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의 보편적 사랑을 질투하지 않고
독점적인 사랑만 사랑으로 느끼기에
주님의 보편적 사랑에서는
사랑을 못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모두를 사랑하시도록
주님께 자유를 드리고
보편적 주님 사랑의
작은 한 조각으로도 충만할 줄 아는
사랑의 박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