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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피는 생명이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8 조회수958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 피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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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막가파나 요즘의 강호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우리 보통 신앙인들보다 더 깨끗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 희생당한 사람들 중엔 역시 천주교를 열심히 믿어오던 사람도 있습니다. 성당에 봉사하러 오다가 그런 변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땐,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당신께 그렇게 온 힘을 다하려는데 고작 주시는 것이 크나큰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이라니.’

그러나 그 자녀의 죽음을 보면서도 부모는 신앙을 잃지 않고 딸의 그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모습을 볼 때 동시에 믿음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존경스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성인 밑에 순교자 난다.’는 말들을 가끔 합니다. 이는 성인처럼 사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 그 사람과 비교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그와 비슷한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은 풍자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무죄한 순교자 아기들은 정말 예수님이 그 마을에서 태어나셨다는 이유로 모두 몰살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이야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겠지만, 그 부모들은 예수라는 아기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들은 아직 이성이 온전하지 않은 아이들이었고 스스로 순교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해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들을 교회에서는 ‘순교자’라는 칭호를 주어서 예수 성탄과 이어지는 큰 축제일 중의 하나로 지내고 있는 것일까요?

 

순교란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기들에게 믿음이 있었고 믿음을 증거하려는 의지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죽음을 당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역시 무고한 죽임을 당하는 낙태되는 아이들과 다르게 더 특별한 공경을 받는 것일까요?

물론 이들이 믿음을 증거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헤로데의 그 잔악한 살인 만행으로 인해서 진정 유다의 왕도 두려워하는 천상천하의 왕이 태어나셨음을 피로서 증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사탄의 것이고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와가 죄를 지어 모든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그 이후로 어떤 좋은 것이 태어나려 하면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어쩌면 세상에 좋은 것이 오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귀의 모습은 바로 헤로데인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메시아가 탄생하는데 사탄이 날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모든 아기들이 죽은 것처럼, 또 교회가 태어날 때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뿌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탄생에 수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어린 순교자들은 그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피를 흘린 사실상 첫 번째 순교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몫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 보상을 함께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성모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히신 것처럼, 그들도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미리 뽑힌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이 무고한 순교자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 주위의 많은 고통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아버님도 10년 이상을 루게릭으로 고생하고 계신데 저에게 당신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셔야 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신은 이미 당신 잘못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고통을 받으셨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미워하셔서 지독한 벌을 주시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통공’을 설명하며 아버님의 고통은 당신 자신의 보속을 넘어서서 이제는 보이지 않는 필요한 곳에 하느님께서 쓰시고 계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치 소화 데레사가 봉쇄 수도원에서 하는 작은 기도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 시킨 것과도 같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공로를 우리 모두가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늘 무고한 아기들의 고통은 이렇게 우리에게 더 깊은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 이유 없는 고통들에도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중요한 것은 딸을 잃은 부모님께서 그 고통이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깨달으셨던 것처럼, 다 ‘이유’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왜 나만’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 그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어디에선가 새로운 탄생에 쓰이고 있다고 믿으면 무고한 순교의 길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아무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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