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새해 아침 2011년 1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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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0-12-29 | 조회수54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새해 아침 2011년 1월 1일
루가 2, 16-21.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새해를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할 것을 빕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그분의 은혜로우심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은 2011년을 시작하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 축일’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의 평화’를 비는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은 기원 후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라고 반포하면서 채택한 표현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풀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는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공의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천주의 성모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 교의(敎義)입니다. 1970년 교회는 그 교의 표현을 사용하여 오늘의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마리아로부터 출생할 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축일을 교회가 제정한 것은 우리는 다른 이론에 바탕을 두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고 믿는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백성을 평화롭게 살도록 해 주면. 모두가 평화를 누렸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한 것은 세계의 평화는 이제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성탄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러 퍼진 천사들의 환호가 알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루가 2, 14).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 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이웃의 자유를 빼앗고 억누르면서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싶으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용서하면서 그 섬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웃을 보살피며 섬기는 사람 안에 참다운 평화가 있습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가복음서(7, 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졌습니다. 은혜롭게 영접하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은혜로운 것이 되게 해야 하는 세월입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뜻이 담긴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 같이 착각하면서, 욕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이웃에게 무자비하기도 합니다. 1970년 노벨상을 받았던 구소련의 반체제 작가 솔체니친이 망명생활 후, 고국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여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 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으며,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새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베푸신 좋은 한 해를 시작합시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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