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올해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福 많이 받으시고
여러분 가정에도 건강과 평화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福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올 한 해 동안 힘들고 어려워도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福이요
올 한 해 동안 외롭고 눈물 나는 일이 있어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福입니다.
예수님은 은총 자체이시고 복 자체이십니다.
모든 복은 예수님, 그 분에게서 나옵니다.
인간 예수가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태어나신 곳은 마굿간, 양아버지 요셉의 직업은 동네마다 다니면서
상다리, 닭장 고쳐주는 초라한 목수였습니다.
또 성부의 뜻을 받들고자 한 3년은 외롭고 힘든 전도생활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형에 처형된 그 고달픈 인생이 복덩어리겠습니까?
인성의 복은 없으셨지요.
성모님은 얼마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을까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마리아여!’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성모님은 박복하기 이를데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는 것을 믿겠습니까?
그 당시 유다땅에서는 처녀가 잉태했다고 하는 것은 돌에 쳐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간음죄였지요...성모님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켰어요.
요셉성인은 성모님을 동정으로 지켜주셨고, 아들 예수를 지켜주셨어요.
마리아는 남편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예수도 삼십에 집을 떠나 방랑선생노릇을 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율법학자들이 ‘저 놈 죽여야 된다!’
늘 노심초사하는 성모님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또 나중에는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봐야 하는 그 여인이 어찌 복이 있다고 보겠습니까?
오죽하면 성모통고 축일이 있겠습니까?
매괴성모님은 칠고성모님이라고 그러지요?
성모님의 일곱 가지 고통, 성모칠고가 뭡니까?
첫 번째, 시메온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으신 것
두 번째, 헤로데가 예수님 죽이려고 하니까 에집트로 피난가신 것
세 번째,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흘 동안 찾아 헤매신 것
네 번째, 고통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신 것
다섯 번째,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아들을 지켜봐야했던 엄마의 고통
여섯 번째, 죽은 아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비통에 젖으신 것
일곱 번째, 아들의 장례를 치른 것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고 그랬지요?
이렇게 고통덩어리로 살았던 성모님께 무슨 복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과 성모님, 이 모자가 하나같이 이렇게 박복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 고 하셨는데
우리 신자들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차원의 그런 복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면
올 한해가 福으로 변할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공현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공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이 세상에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 이방인들을 동방박사니, 삼왕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이었는데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유다 땅에 찾아왔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백성들은 이방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유다인들은 오히려 메시아를 배척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판단과 지혜를 초월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숨겨진 상태에서 오시기 때문에 늘 우리가 몰라봅니다.
내 집에 24시간 내내 예수님이 계셔도
성모님이 24시간 내내 같이 살아도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을 못 봅니다.
매일같이 성체를 영해도 예수님 내 안에 들어오심을 모릅니다.
어떤 자매가 시어머니와 남편의 반대가 너무 심했지만 기를 쓰고
예비자 교리반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어요.
그 후 시아버지가 암에 걸려 고생할 때 친딸도 '나 몰라라~' 했지만
지극정성으로 시아버지를 간호하고 장례까지 잘 치렀어요.
그 모습을 지켜본 그 시어머니와 남편이 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는데 우리 신자들은 조그마한 인간적인 장애와 조건에도
자주 넘어지고 쉽게 포기합니다. 작은 시련이 와도 하느님 멀리하고
무슨 핑계만 생기면 신앙을 가차 없이 내던지기 일쑤입니다.
오늘 박사들은 1200킬로가 넘는 거리를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귀중한 선물로 경배하였습니다.
분명 세 王이나 헤로데나 똑같은 모양의 별을 봤건만
그들의 생각과 행동의 크기는 달랐습니다.
주일날 이 자리에서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나가서 살아가는 열매가 다릅니다.
똑같은 성서를 보아도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체험을 하여도 어떤 이들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봅시다.
첫 번째,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삼왕처럼
만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고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한 적은 있는가!
두 번째, 세 왕은 온갖 고생 끝에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올 일 년 동안 많은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신앙적으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남에게 떠맡기려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올 때마다 많은 걱정을 하는데
걱정은 백날 해봐야 마귀가 치고 들어옵니다.
걱정을 하면 어둠이 들어오지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 왕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사막을 건너고, 산적도 만나고
오만 어려움을 만났지만 걱정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오로지 하늘에 떠있는 메시아를 나타내는 별을 보고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어렵게 귀중하게 가지고 온 선물을 드렸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마지못해 드린 것이 아니라 기쁘게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바치는 봉헌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기쁘게 드려야 됩니다.
선물은 눈에 보이는 예물과 눈에 안 보이는 착한 행위가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눈에 보이는 올바른 봉헌의 삶,
신자로서 기본적인 것, 헌금, 교무금 할 때 마다
그 안에 정성이 들어가 있어야지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 깨달아야 됩니다.
또 외적으로 드러나는 선물, 선행의 예물 드려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王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헤로데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
다른 길은 선행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즉 영세를 하고
미사 때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이 성당을 나간 후에는 죄악의 길이 아니라 선의 길로 가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과거의 죄를 청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별이요, 나침반입니다.
올 한 해 동안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우리 영혼에 떠오르는 그 별을 보고
어떤 난관과 어려움이 오더라도 주님을 찾아가야 됩니다.
또 그분을 만났을 때 드려야 될 선물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아기예수님께 선물을 드려야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천신만고 끝에 아기 예수님에게 나타난 이 동방박사들처럼
올 일 년 동안 십자가의 어려움, 때로는 병의 어려움 때문에 힘이 들지라도....
주님이 보여주신 별을 바라보면서
담대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결심합시다...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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