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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12 조회수401 추천수3 반대(0) 신고

열병으로 누워있었는데(마르1,29-39)

  -유 광수신부-

 


그 무렵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가셨다.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악령 들린 사람에게 "조용히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하며 서로 놀라는 모습을 보았다.  권위 있는 말씀으로 치유받은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보여 주신다. 즉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오늘 복음에서 열병으로 누워 있던 부인이 일어나 시중을 드는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는데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할 부인이 열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이었다. 일어나서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겠는데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상황이다. 시몬의 장모가 무슨 병으로 열이 나서 누워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손님이 오셨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있다는 것이다. 누워 있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열병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하나의 악이다.

우리도 열이 나서 자리에 누워 있을 때가 있었는가? 언제 또 무엇 때문에 열병을 앓았는가? 열병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열병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배반당했을 때, 부부 싸움을 했을 때,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화가 났을 때, 또는 질투심이나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이유로도 열병을 앓을 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육체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로 열병을 앓을 때가 더 많은 지도 모른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심하게 열병을 앓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이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신 후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툰 일이 있다(마르 9, 33 참조).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는 것은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이요, 그것 때문에 자기들 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더러운 영은 우리를 열병으로 누워있게 만든다. 정신적인 대부분의 열병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에 의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더러운 영의 노예가 되어 생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열병이든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그래서 자리에 눕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악이다. 악은 사람을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만들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기에 어떤 열병이든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반드시 치유받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열병을 앓아서도 안되고, 또 다른 사람이 열병을 앓게 원인 제공을 해서도 안 된다. 이런 모든 악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또는 잘못된 주위 환경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앓고 있는 열병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 사람들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무심코 읽고 지나칠 수 있지만 그 당시 사정을 안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 굉장히 개혁적인 일이다. 그 당시에 여인의 존재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증인으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거기에다가 늙고 열병으로 누워있는 보잘 것 없는 여인이라면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도 있는 여인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코전1,26)라는 말씀대로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마르코 복음이 모두 600여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00여 문장이 여인에 관한 문장이며 그것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여인이 등장한다. 그마만큼 예수님은 여인의 위치를 존중해주셨고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고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3-35)라고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신다.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 무슨 뜻인지,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보여 주신다. 복음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다. 높고 화려하고 힘있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관점과는 정 반대되는 가장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봉사받는 삶이 아니라 봉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인간적인 사고와 가치관에서 복음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바뀔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에 눈을 떴다라고 말 할 수 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삶을 산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실현시켜야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복음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삶은 힘있고 가진 이들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인간도 실현시킬 수 있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이다. 가장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열병으로 앓고 있는 병자들이 생활하고 있는 나라와 열병에서 치유되어 일어나 봉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다. 이런 새로운 삶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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